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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작가 May 03. 2024

자꾸 그러면 나 섭섭해~

<아내와 글쓰기 프로젝트 #10. 장수풍뎅이>

이번엔 나를 주제로 글쓰기를 한다고?

나에 대해 딱히 쓸 말이 있을지 모르겠군.

나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나랑 얽힌 사연도 없어

난감할 것 같으니 오늘은 내가 할 말 좀 하지.


너희들은 나에게 막연한 환상 같은 걸 갖고 있는 것 같아.

아마도 내 멋진 외모 때문이겠지. 로봇 같기도 하고, 

매끈한 갑옷과 뿔 투구를 보면 반할 만도 하지.


그런데 왜 그랬던 거야? 

단물만 쏙 빼 먹고 버리기야?

배트맨 말이야. 수트만 보면 딱 나더구만.

무광 배트카도 나 베낀 거 아니었어?

(장수풍뎅이 암컷은 무광, 수컷은 유광이다.)

나에 대한 언급 한마디 없이 공은 박쥐한테 다 돌려?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왜? '풍뎅이맨'은 쪽팔렸냐?

(영어로는 Rhinoceros beetle

'코뿔소 풍뎅이'다.)



너흰 내 외모뿐 아니라 인품을, 

아니 충품(蟲品)을 높게 평가하는 것 같더군.

난 생긴 건 이래도 절대 살생을 하지 않아.

곤충도 안 먹고 나무 수액이나 과일을 먹는다고.

불가피하게 누가 시비를 걸면 어쩔 수 없이 싸우지만

오로지 뒤집기 기술로만 상대를 제압하지.

난 평화주의자야. 그런데 여기서 한마디 해야겠어.

너희들이 나무위키에 나에 대해 써 놓은 것 말이야.

장수풍뎅이 자체의 살상능력은 거의 전무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머리뿔로 상대를 들어 올려 머리뿔과 가슴뿔
사이에 끼우면 상당한 살상력을 발휘한다.
다만 장수풍뎅이가 싸울 때는 뿔로 뒤집거나
쳐올려 던지는 것에만 충실하기 때문에, 뿔 사이로
넣어 부수는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지능이 높지 않다. 
그 정도로 지능이 높지 않다.


뭐라고라고라고라~

그 정도로 지능이 높지 않다고라고라고라~

오늘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

난 머리가 나빠서 안 죽이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 싶다 진짜...

나 불교야.


말 나온 김에, 너희들 자꾸 

왜 사슴벌레랑 나랑 싸움 붙이는데?

답을 알려줄 테니까 싸움 붙이지 마.

걔는 내 적수가 안 돼.

내 힘이 훨씬 세고 몸무게도 내가 더 나간다고.

(몸무게의 81배에 달하는 무게를 들거나 끌 수 있다.)

그나저나 난 싸우기 싫으니까 그냥 내버려 둬 제발.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한 마디는 해야겠어.

일본에 '장수풍뎅이 자판기'가 있다는 거 알았어?

너희들은 거기서 우리를 편하게 골라 간다지만

우리에게 거긴 감옥을 넘어 지옥이나 다름없어.

먹을 것도 없이 좁은 공간에서 버티다가

누가 뽑아주면 겨우 세상 빛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세상 빛을 본다고 자유가 있는 건 아니야.

사람들이 자판기에서 우릴 뽑는 

대부분의 이유가 뭔지 알아?

싸움을 시키기 위해서야.

놀이처럼 계속 싸움을 붙이는 거지.

얘기했지? 나 싸움 싫다고. 불교라고.

살생하지 않는 충품에 끌려 좋아할 땐 언제고

왜 계속 싸움을 시키냐고!!!


물론 이 자판기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어.

먹이도 없이 가둬두는 건 너무 잔인하다는 거지.

그런데 이에 대한 답이 뭔 줄 알아?

너무 인기가 좋아서 자판기 안에 있는 시간은

고작 서너 시간이라 괜찮다는 거야.

이게 말이 되냐? 너흰 밤에 잠도 안 자고 

자판기에 줄 서서 계속 뽑냐?

다 좋다. 그런다고 치자.

그런데...


'고작 서너 시간'이라고?


너흰 우리가 얼마나 살 것 같애?

장수풍뎅이의 '장수'가 오래산다는 뜻으로

아는 모자란 애들이 있는 것 같은데

군대의 우두머리 장수(將帥)를 뜻한단다.

우리 생각보다 오래 못 살아.

우리 수명은 고작 1년 정도밖에 안 되고

너희들이 알고 있는 우리 모습, 

성충으로 사는 기간은 1~3개월이야.

느낌이 잘 안 오지?

인간이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3개월 장수해도 54일을 갇혀 있는 거고

1개월 살면 무려 10년 이상을 갇혀 있는 거라고!

너희에게 서너 시간은 별거 아닐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어머어마한 시간이야 이놈들아!



이제 곧 여름이 오는데 산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출현시기는 7월~9월. 야행성이다.

불빛에 끌리는 습성이 있어 산기슭 가로등 주변에

불빛을 찾아 날아온 장수풍뎅이를 볼 수 있다.)


아는 척도 안 한다고 오해하지는 마.

사실 나 시력이 좀 안 좋거든.

(빛과 어둠만 구분할 수 있다.)


반가우면 먹다 남은 과일이나 좀 주면 좋겠어.

괜히 잡아가서 싸움시킬 생각은 말고.

이름만 장수(將帥)지 싸움 싫어하는 장수야.

나 그냥 장수(長壽)풍뎅이하고 싶어.

나 자꾸 괴롭히고 싸움시키면

너 다음 생에 장수풍뎅이로 태어난다.

말했지? 나 불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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