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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작가 Apr 18. 2024

여인의 향기

<아내와 글쓰기 프로젝트 #9. 색>

이번 글쓰기 주제는 '색'이다.


'색'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크레파스, 색종이? 순수함을 잃지 않으셨군요.

봄의 노랑, 가을의 붉은색? 혹시 연세가...

빨간색, 파란색. 그럼 정치? 환자가 의심됩니다.


내가 먼저 떠오른 건 다른 '색'이었으니

여색, 색드립 할 때 그 색(色)이었다.

그렇다. 난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건강한 사람이다.


나는 색드립을 좋아한다.

색드립을 가장 높은 수준의 유머라고 생각한다.

금기시되는 상황이나 대상에 적절한 선을 타며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유머의 최고봉.

직장 상사 같은 윗사람이나 정치인 같은 권력자를

돌려 까는 유머나 절대 웃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날리는 개그, 웃참에 실패하는 웃음을 특히 좋아한다.

장례식장에서는 앞에서 절하는 사람 양말에 난

빵꾸만 봐도 그게 왜 그리 웃긴지 모르겠다.

(웃참실패의 대표적 고전 케이스가 이런 거다.

https://youtu.be/ufquNzI3oko?si=Z5NMQPB_NWmMIu8W)


색드립도 마찬가지다.

너무 야하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아야 하고

듣는 사람의 성향, 기분과 감정을 살펴야 하며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하는 예민한 촉이 필요한

고도의 능력이 필요한 유머가 색드립이다.


특히 요즘과 같은 시대에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신상에 문제가 생길 수 있거나

한 사람의 인격과 근본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어

굉장한 조심성과 용기, 센스가 동시에 필요하다.


행실이 부도덕하거나 난잡한 사람이 던지는 색드립은

반전의 묘미, 재미와 감동이 반으로 준다.

기쁨 주고 사랑받는 완성도 높은 색드립을 위해서는

평소 바른 언행과 이미지 관리에도 신경 써야 한다.


여기서 잠깐 용어 정리.

색드립이냐 섹드립이냐.

Sexual + ad-lip으로 만들어진 조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처음엔 빛 색(色)+ ad-lip으로 만들어졌다. 이미 2010년대 초반에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와 언론 등에서 '색드립'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국립국어원에서 낸 2012년 신어 자료집에서도 색드립은 빛 색(色) 자와 ad-lip을 합쳐 만들어진 혼종어라고 명명하고 있다.
- 출처 : 네이버 나무위키 -


요즘엔 섹드립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색드립이 맞는(?) 표현이라는 점~

직설적이고 야한 느낌의 섹드립보다는

은근하고 착한 느낌의 색드립이 내 취향에도 맞다.



그런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DNA 탓도 있겠지만 환경적 요인도 큰 것 같다.

남중, 남고, 남대(전공이 토목이라...), 군대, 회사까지

죄다 남자만 득실대는 환경에 있다 보니

쌓였던 양기가 입으로 몰리며

색드립을 칠 환경에 많이 노출된 탓도 있다.


색드립도 색을 좋아해야 할 수 있는 법.

영웅호색이라고 했던가.

사회인 야구를 할 때에도 우리 팀이건 상대 팀이건

여성 관객이 있으면 이상하게 힘이 난다.

나랑 아무 관련도 없고,

정작 여성은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을 텐데도

그냥 더 잘하고 싶고, 더 멋있는 플레이를 하고 싶다.

본능이 느끼는 거다.


이성에 끌리고 관심을 갖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본능을 거스른 채 안 그런 척 숨기며 "에헴"하고

"전 그런 사람 아닙니다"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본능에 충실한 것, 그것도 여색(?)을 밝히는 것은

왠지 추하고 더러운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 같은 사람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지만 바꿔 생각하면

더욱 (희)귀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뜻 아닐까?


이런 내 취향에 딱 맞는 영화가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여인의 향기"다.

(이 영화를 아직 안 본 분이라면 꼭 보시기 바란다.)

이 영화엔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모두 들어가 있다.

정의, 유머, 모험, 도전, 인생, 브로맨스, 그리고 여자.

이 영화를 몇 번을 봤지만 볼 때마다 좋았다.

몇 년 전 아들과 둘이 이 영화를 같이 보기도 했다.

(아들도 영화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고,

나는 그런 아들을 보며 또 한 번 감동을 받았다.)


가장 알려진 장면은 알파치노의 탱고 춤 씬이지만

그건 이 영화의 극히 일부 에피소드일 뿐이다.

그런데 왜 제목은 생뚱맞게 "여인의 향기"로 지었을까?

어그로를 끌어보려고 그랬을까?

생각 끝에 내 나름의 답을 찾았고,

제목 참 절묘하게 잘 지었다는 감탄이...



퇴역 장교 알파치노는 군대에서 사고로 시력을 잃었고

생을 마감할 계획으로 자살 여행을 떠난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었던 것을 이루고 죽을 계획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살아갈 의지를 주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여자였다.

"You know what's kept me goin' all these years? The thought that one day... Just the thought that maybe one day, I'd - I could have a woman's arms wrapped around me - ane her legs wrapped around me. ... That I could wake up in the morning and she's still be there. The smell of her. All funky and warm."
("지난 몇 년간 날 지탱해 주는 게 뭔지 아니? 그 생각이야.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 내가 여자의 팔에 안겨 있는 거야. 그녀의 다리가 날 감싸고... 내가 깨어난 아침에도 그녀가 그대로 있어야 해. ... 그녀의 체취, 그 따뜻함 말이야.")
- 영화 <여인의 향기> 中 -


알파치노는 여자를 좋아하는 본성을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드러냈지만

그것이 전혀 추해 보이지 않았다.

여성을 존중하는 젠틀함이 깔려 있어서였다.

누구보다 여성에게 예의를 갖출 줄 아는 사람.

호색(色)은 더럽고 추잡한 게 아니고

젠틀함과 양립할 빛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


그에게 여성, 여인의 향기는 삶의 원동력이었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여성의 비누향을 맡고 제품명을 정확히 맞히는

오타쿠적 전문성과 여성에 대한 존중과 진실함,

적절한 유머까지 갖춘 매력적인 사람.

본능을 부정하지 않고도 멋있을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본능과 직관은 참고 감춰야 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면서 더 귀 기울여야 할 부분이 아닐까?


복잡한 이유를 들어 정당화되는 행동은
나쁜 행동이다.
양심의 결정은 언제나 단순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다.

- 톨스토이 -


색드립 이야기에서 톨스토이까지 소환하고

양심까지 들고와 비유하는 것은

큰 무리수를 둔 것 같지만 아무튼

복잡하게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 귀 기울이는 단순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럴 때 더 재미있고 역동적인 삶이 펼쳐질 테니.



나이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젠 그만해야 할 것들,

포기하고 빠져줘야 할 것들이 늘어간다.

물론 적당한 물러남도 필요하겠지만

일부러 포기하고 물러날 생각은 없다.


학창 시절, 사회 초년병 때는 눈치 보고 나를 감추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의 나로 살았던 것 같다.

이제야 조금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답게 살 준비가 된 것 같은데 지금부터

감추고 포기하고 물러나기엔 내 삶이 너무 아깝다.


공자가 일흔에 이르렀다는 경지.


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

본능을 일부러 억누거나 외면하지 않아도

법도에 어긋남 없는 세련된 색드립을

마음껏 날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

(색드립에 공자까지 소환하는 무리수를 또...)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색드립에 제동을 걸어주고

좋은 건 좋았다고 인정해주는 자체 검열기

아내 덕분에 '종심소욕불유구'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여보, 감사합니다.
저에게 삶의 의미, 삶의 원동력은
"여보의 향기"입니다.


집에 가서 또 한 소리 들을 것 같은 느낌이...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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