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쏟은 한 달,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
7년 전, 스페인에 왔을 땐 충분하지 못했던 시간 때문에 성가족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너무 궁금한 곳이었지만 성당 밖으로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릴 엄두를 내지 못해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이 성당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바르셀로나에 다시 올 것을 다짐 했었는데, 그 다짐이 현실이 되었다.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성당으로 들어가기 위한 티켓을 예매하고 당일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성당에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리 성당에 집착하는 건지 나도 잘 알 수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성당이란 공간이 주는 진지함과 묵직함을 좋아했던 것 같다.
성가족성당은 한 마디로 대단함과 기괴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건축물이다. 성당 어디에서도 전형적인 성당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벽도 그냥 벽이 아니고, 문도 그냥 문이 아니며, 기둥, 천장, 창문 그 어느 것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다. 성당에 담긴 너무 많은 이야기와 디테일 때문에 나중에는 좀 지친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가우디는 정말 외계인이 아니었을까? 외계인이 지었다고 한다면 말이 될 것 같다.
겉 모습에서도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지만,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그 예사롭지 않음은 배가 된다. 세월의 흐름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중인 외부와는 다르게 성당 내부엔 고이 간직된 숭고함과 고결함이 처음 느낌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성당이라는 것을 알고 들어갔으니 성당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사실 그곳의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신 스테인드 글라스, 뼈의 모습을 형상화한 기둥의 모습, 사방에서 쏟아지는 빛만 봐서는 이곳이 성당인지 아닌지, 아니 그보다 이곳이 이승인지, 저승인지, 아님 천국인지 알 수 없어지는 몽롱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정말이지 성당 안에 있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나 고민 등이 느껴지지 않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조예가 깊지 않아 그가 남긴 메시지를 모두 찾아 내거나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저 보는 것 만으로도 신이란 존재와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이 성당은 그런 힘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이곳에서 미사까지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인데, 성가족성당에서도 미사가 열린다. 많은 관광객이 이 성당을 찾는 연유로 이곳이 ‘관광지’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사실 이곳은 엄연히 미사가 진행되는 ‘성당’이다. 그래서 미사 시간에 맞춰 예배당으로 들어가면 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할 것이 분명했지만 사실 기도를 하는데 언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미사 시간을 확인하고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 예배당 쪽으로 가보니 어느 새 먼저 온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가족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게 되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상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카탈루냐어)로 미사가 진행되었지만 애초에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신부님의 온화한 말투, 표정, 그리고 몸짓 나아가 그곳에서 원래 미사를 보시던 어르신들이 내게 보낸 따뜻한 눈빛에서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전달되었다. 누가 봐도 잘 못 알아 듣고 있는 듯 보이는 내게 눈빛과 미소로 미사의 순서를 알려주셨던 분들 덕분에 미사를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재미있었던 기억은 미사 말미에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 거리며 나라 이름을 외치던 순간이었다. 해당 미사에 관광객이 많이 참여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신부님이 자신이 가장 먼 곳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던 순간. 나도 아주 큰 소리로 “코리아!” 라고 외쳤고 신부님은 내게도 “할레루야!”라고 외쳐주셨다. 굉장히 벅찼다. 나도 그리고 우리 나라도 앞으로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사를 마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성당 밖에서 레이저를 이용한 행사를 했고, 나는 그것까지 관람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 기간이 짧았다면 어떤 성당 하나를 둘러보는데 하루라는 시간을 통으로 쓸 순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성당을 제대로 볼 수 없었음을 물론이고 이렇게 여유롭게 미사까지 볼 순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늘 내가 느낀 이 설명하기 어려운 벅참의 순간도 맞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여행이 또 한번 감사해지는 순간이었다.
축복받은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