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3일 새벽 두 시. 남로당 조직원 350여 명이 무장을 갖추고 제주 경찰서 지서 10여 곳을 습격했다. 제주 남로당이 일으킨 소요사태에 이승만 정부는 육지에서 대규모 토벌군을 들여왔다. 이들에 의해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자들은 반동분자로 새빨갛게 덧칠됐다. 당시 제주도 인구 30만 중 3만여 명이 희생당했다.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학살을 일컫는다. 혹자는 4·3 사건을 한국 전쟁의 축소판이라 부른다. 골육상잔의 신호탄이라는 것이다. 거의 제주도 모든 지역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일어났다. 진압을 빙자한 잔혹의 역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외마디 비명 속에 스러져 간, 이날의 흔적은 ‘사건’으로 명명된다. 고작 사건이다. 참 무미건조하게도. 4·3에 대한 해석과 규정이 미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나. 제주 4·3 사건은 내 기억과는 철저히 유리돼 있었다. 4·19, 5·18, 6·10의 강렬함과는 달리 4·3이 내게 주는 이미지는 희미했다. 분명 고등학교 때 근현대사를 사회 선택 과목으로 택했고, 나름 공부도 재미있게 잘한 것 같은데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
그날의 단편은 2017년 11월 24일 전파를 탔던 <알쓸신잡 2>으로 말미암아 알게 됐다. 정규 교육과정이 아닌 예능 프로그램으로 말이다. 알지 못했다. 한 인간의 내면에 빛과 어둠이 동시다발로 녹아 있듯, 제주라는 섬도 그러하다는 것을. 내게 제주는 예쁜 독립서점들이 가득한 곳, 감귤과 산호초가 함께하는 산뜻한 곳이란 이미지뿐이었다. 관광지로만 보았던 셈이다. 나는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만 소비했다.
현재 두 건의 4·3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지난 9월 16일 제주도의회는 '제주4·3특별법 개정 촉구 건의안'을 채택했다. 정부와 국회를 향한 제주의 목소리다. 개정안이 통과돼야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 걷히고 희생자의 명예가 원복될 것이다. 보상 문제도 논의될 것이다.
바라건대, 하루빨리 4·3 뒤의 수식어가 사건이 아닌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말로 대체될 즘에야, 지난날에 무심했던 우리 사회의 과오가 조금이나마 희석되리라. 어떠한 가치 판단도 녹아 있지 않은 단어는 사람들 기억 속에 생착되지 않고 휘발되고 만다. 4·3의 수식어가 사건으로 남아선 안 된다.
“슬픔에는 이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이념적 상찬이나 폄하나 언어의 꾸밈이나 위로도 모두 제주를 자기 구미대로 말아먹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슬픔은 그냥 슬픕니다. 영원이 슬픕니다.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억은 절대 자살하지 않습니다”(도올 김용옥, 우린 너무 몰랐다, 통나무, 2019, pp. 217-218).
그날의 트라우마는 그들을 신자로 만들었다. 그들은 기억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