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에 끼워둔 마른 나뭇잎처럼
기억 한 조각을 물고 창과 마주한다.
팔각지붕에 눌러앉은 햇살은 어디로 달아났을까. 소리 소문도 없이 저녁 그림자가 기왓장을 덮었다.
범종 소리를 기다리며 차방 바깥을 내려다본다. 번뇌의 무게를 견디는 기왓장들이 무겁게 줄지어 누웠다.
'사랑은 처음부터 가질 수 없는 것인데,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행위란다.'
글귀 한 구절 떠오른다.
고속도로를 달려오면서 산자락에 아직도 남아 있는 단풍이 가지마다 뭉툭 뭉툭, 매 맞아 부풀어 오른 멍 꽃처럼 보였었다. 책갈피 속에 박제된 채 잊혀 가는 잎처럼 푸석푸석, 이제 막 사그라들기 시작한 멍처럼 누릇불긋, 그렇게.....
오후 여섯 시 경. 저녁 공양이 끝나고 종각에 불이 켜졌다. 드디어 목어 소리를 듣게 되는 모양이다.
법고, 범종, 운판 그리고 마지막이 목어 순서였는데 목어는 너무 짧게 끝이 났다. 겨우 이, 삼 분?
요즘은 목어 치는 사찰이 드물다고 해서 해인사까지 찾아왔는데... 잠시 멘붕 상태. 이럴 때 허무하다고 해야 하나?
주위가 캄캄해진 것은 산을 내려올 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서 어둠을 가르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빗방울까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멧돼지. 야생동물. 처녀귀신. 전설의 고향. 새 울음소리... 섬직한 단어들이 떠오르며 온몸의 세포가 일제히 일어섰다.
한참 동안 어둠 속을 오르락내리락 헤매다가 숨은 그림 찾기 하듯 풀 섶 근처에 세워진 차를 간신히 찾아냈다. 헤드라이트를 켜고서야 큰 숨을 내쉬며 의자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신경숙 작가의 <부석사 가는 길>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