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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

by 김두선

육십 촉 전구 알을 품은 갓 아래로 뽀얀 조명이 흘러내린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서넛네댓씩 마주한 청춘남녀의 얼굴이 불빛 아래 더욱 화사하다. 바라보기만 하여도 푼푼한 것은 젊은 에너지가 옮겨 부어지는 탓일까. 오페라 아리아의 한 토막과, 찻잔 속의 더운 김이 녹여내는 이곳의 저녁은 더 이상 분주하지 않다.



익숙지 않은 번화가에서 손客을 만나는 일이 내게는 매번 큰 고민거리였다. 갑자기 약속장소를 정할라치면 평소에 아름아름 들어둔 정보가 없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두 군데는 떠오를 만도 한데 도무지 생각나는 곳이 하나도 없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이 고민을 해결해 준 건 바로 이 찻집이다. 맨 처음 들어섰을 때 내 눈에 꽂힌 것은 등燈이었다.

천장을 층단으로 구성한 반자에서부터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이로 줄을 내려 등을 달았는데, 올 때마다 갓으로 쓰인 용수가 기억을 잇는 삼중 징검다리가 되었다.



내가 용수를 처음 본 것은 추억마저 아련한 어린 시절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을까. 어머니는 밀주를 자주 담갔다. 부엌에서 고두밥 찌는 냄새가 진동을 한 다음 날이면 두꺼운 담요로 둘둘 말아놓은 술독이 뜨끈뜨끈한 안방 아랫목을 어김없이 차지했다. 술이 익어갈 때쯤 항아리 뚜껑을 열면 안에는 망이 하나 박혀 있었는데, 대오리로 씨와 날을 서로 어긋매끼게 엮어 짜서 만든 깊고 둥근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먼저 이 망 안에 고여 있는 맑은술을 떠낸 다음, 긴 됫병에다 그득 붓고 뚜껑을 꼭꼭 틀어 잠갔다. 그러고는 반들반들한 술병을 몇 번이고 행주로 더 문지른 다음, 신줏단지 모시듯 부뚜막 한쪽에 정성스레 세워두곤 했다.


그때는 술 거르는 이 망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맑은술을 떠낼 때마다 ‘세상 괴로움도 다 걸러져서 말간 날, 좋은 세상에 살아봤으면 좋겠다.'며 버릇처럼 읊조리던 어머니의 독백만이 그 의미도 모른 채 내 귓전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것이 놀이 좋아하는 남편과, 자식 넷을 감당하는 어머니의 인생살이가 벅차고 힘들다는 하소연인 것은 내가 그때의 어머니 나이쯤 되고 나서야 알아차리게 되었지만.


간식거리가 마땅찮았던 그 시절. 독 안에서 뽀글뽀글 탄산 터지는 소리는 내게는 디데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술지게미는 관심을 끄는 꽤나 괜찮은 먹거리였으므로. 빨간 글씨로 ‘OO당’이라고 적힌 네모진 비닐봉지 속 하얀 가루는 마법의 맛을 만들어냈다. 어머니가 그것을 술지게미에 솔솔 뿌려 한 사발 저어주면 달큼 들큼한 것이 얼마나 맛있던지. 어느 날은 몰래 여러 번 찌끼에 타먹었는데 천지가 흔들거리는 어지럼증을 못 이겨 툇마루에 뻗어 잠들었다가 혼이 난 적도 몇 번 있다.



밀주를 담갔던 기억은 나의 청소년기와 함께 사라져 간 듯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는 고두밥 찌는 일을 멈추었고, 덩달아 술 익는 냄새의 기억도, 그 망에 대한 기억도 뇌리에서 지워져 갔다. 이것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억수같이 퍼붓는 장대비가 기세를 부렸다. 하지만 빗줄기가 작정한 내 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광복의 후유증과, 뒤이어 찾아온 전쟁이라는 참혹한 사태를 운 좋게 비켜 갈 수 있었기 때문일까. 베이비붐 세대의 경계에 태어난 나는 바로 앞 세대가 겪었을 역사적 현장이 남아 있는 이곳에 한 번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간절했다. 더구나 코로나로 인한 관람인원의 제한으로 힘들게 붙잡은 기회인데 ‘다음에’가 또 다음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투사라도 된 냥 빗속을 가르며 길을 나섰다. 구름이 더께 쌓인 하늘 아래로 희끔희끔 내미는 안산 자락이 신비로웠다. 비 젖은 푸성귀 사이를 헤치며 좁은 언덕길을 따라 오르니 적벽돌의 육중한 건물이 얼굴을 드러낸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이 역사적인 현장에 드디어 발을 내딛게 되다니! 왠지 모를 버거운 감격에 빗물이 눈물처럼 느껴졌다.


전시관에는 형무소에서 사용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수갑, 족갑, 물고문방, 형틀, 손톱 밑을 찌르는 긴 목재바늘, 일본순사들이 사용한 단검과 장검들, 고문인두, 손톱 뽑는 기구, 벽관, 교수대... 도구마다 그 앞에 서면 공포로 다가왔을 고문의 현장이 연상되어 섬뜩했다. 특히 바늘상자는 온몸을 콩 벌레처럼 말아야 겨우 몸을 쑤셔 넣을 수 있는 크기인데, 좌우로 굴리며 흔들어댈 때마다 바늘바늘 찔리며 피투성이가 되었을 수감자들을 상상하면 소름마저 돋았다.


차마 조국을 배신하지 못해 죽기를 각오하고 견디었을 그날의 애국열사들. 돌이켜 보면 잊어서는 안 될 역사 앞에서 우리는 너무 안일하고 편한 세상을 누리며 그들을 잊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일말의 미안함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디밀어 올랐다.



전시관을 돌아보는 도중, 어느 한 곳에 걸음이 우뚝 멈췄다. 어머니가 술독에 박아 두던 바로 그 용기다. 바닥에 붙여진 표지標識에서 ‘용수’라는 명칭을 처음 습득하며, 궤도를 이탈하고 이곳에 보존된 용수의 쓰임새를 부연설명을 통해 읽어 내렸다. 이것은 일본 순사들이 독립투사들을 사형장으로 이송할 때, 처참한 몰골이 되도록 고문한 흔적을 감추거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하려고 머리에 씌웠다. 민초들의 항거가 두렵긴 했을까.



돌이켜 보면 내 나라 내 땅에서 침략과 약탈을 일삼는 일제의 탄압을 벗어나고자 하는 투쟁이 아닌가. 자유와 평화를 되찾아 우리말 우리 땅을 길이 지켜나가겠다는 참으로 결연한 의지 아닌가. 이처럼 높이 사야 할 투혼이 침략자들에게는 악랄한 죄수로 취급당하는 아이러니라니. 예나 지금이나 힘이 없는 정의는 불의가 되는 세상이므로 절대로 힘의 논리에 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새기게 된다.



군데군데 낡아서 부러진 대살. 뜯겨 나간 가장자리. 거뭇거뭇하게 그을려진 몸체. 일제 삼십육 년을 거치며 살아남노라 지친 자태가 역력한데, 반질반질 윤택 나는 십자형 스텐레이스 막대 끝에 올려진 것이 오히려 용수와 불협화음을 이룬다. 나라가 힘이 있고 부강했다면 이 용수를 머리에 쓰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치는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암울한 침묵이 내려앉은 옥사를 두어 시간 반 남짓 관람하고 떠나오는데 아픈 역사의 한이 주는 무게감 탓이었을까. 발목에 족쇄라도 찬 것처럼 걸음 내딛기가 힘들었다.



‘내가 그를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유명한 시 한 구절처럼, 내가 ‘용수’라는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용수는 하나의 의미가 되어 내게로 왔다. 용수를 알고 나니 용수가 보이기 시작한 게다. 이 찻집에 들어섰을 때, 전등갓으로 매달린 용수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느낀 용수의 비애가 전등 빛을 타고 흘러내린다. 오늘도 세상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저들은 저 갓의 이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형장을 향해 가던 마지막 길에 독립투사의 얼굴가림용으로 사용되었던 그 뼈아픈 과거는 또 아는지 모르는지. 내게 용수는 다만 술지게미를 거르는 망일 수 없는데. 품격을 높이는 인테리어 소품은 더욱 아닌데...


‘여자 팔자는 두레박 팔자’라는 옛말을 떠올리며 어쩌면 용수야말로 진정 두레박 팔자가 아닌가 여긴다. 술독에 박히면 찌끼를 걸러서 손 대접을 위한 귀한 술을 담게 되고, 처절히 죽어간 애국투사의 머리에 씌워지면 절대부동의 아픈 역사를 품게 되며, 끈을 달아 전구를 박으면 고고한 인테리어 소품으로 변신하여 다시없는 분위기 메이커가 되니 말이다.



애국에 청춘을 팔아 감방에서 스러져간 그날의 영웅들. 이 상처 위에 피어난 꽃이 선진국가의 반열에 오른 작금의 대한민국인데, 어찌 그 영광이 달달하기만 할까. 음악과 흥과 젊음 속으로 들어온 도시적 감각의 용수 위로 역사의 상처를 품은 그 용수가 자꾸만 겹친다.


오늘따라 기다리는 손은 왜 이렇게 늦는 것인지.

눈은 연신 문 쪽을 바라보는데 용수에 꽂힌 마음은

그날, 그곳의 기억을 퍼먹으며 비에 젖은 코트처럼 눅눅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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