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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고(三顧)

담양 기행, 명옥헌 원림에서

by 김두선



눈을 감으니 청각이 더욱 긴장한다. 가슴속까지 이는 바람 소리가 나를 그곳으로 살포시 다시 옮긴다. 쏴르르, 쏴르르, 쏴르르.

수석에 부딪혀 유리구슬처럼 구르고, 눕고, 튀어 오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한시 읊는 선비의 목소리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담양군 고서면 후산리길. 목적지로 가는 비탈진 동네 들머리를 들어섰다. 몇 번이나 휘도는 골목 한 편으로 아기자기한 벽화를 구경하는 재미가 끝인가 싶더니 큰 연못이 나타났다. 연못의 중앙에는 작은 섬처럼 생긴 둥근 땅에 마른 가지 앙상한 배롱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고, 연못 주변에는 아직은 얼굴을 감추고 있는 백일홍이 이른 손(客)을 위해 부스스 벗은 가지를 떤다. ‘명옥헌 원림’이다.



연못 오른쪽 둔덕을 따라 올랐다. 몇 개의 돌계단 위로 ‘명곡 오선생 유적비’라고 적힌 기념비가 보이고 조금 더 오르니 기둥마다 걸린 주련과 ‘명옥헌’ 현판이 붙은 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흡을 고를 겸 명옥헌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각난 내 마음처럼 뚝. 뚝. 떨어져 앉는 구름들이 외따롭다.


멀리 하늘이 다가와 동그라미를 그리며 눈앞을 어지럽힌다. 비탈진 언덕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로 담 없이 툭 트인 경관이 답답했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해거름이면 노을이 더욱 아름답다는 이곳. 못에 비친 나무 그림자들을 보며 명곡 오희도 선비는 어떤 상념에 잠겼을까...


고개를 돌려 보니 처마 아래 ‘삼고(三顧)’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중국 촉한의 유비가 제갈공명을 등용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초가로 찾아갔다는 ‘삼고초려’의 고사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임금에 오르기 전, 능양군이었던 인조는 오희도를 등용하기 위하여 세 번 후산마을로 찾아갔다. 하지만 노모의 돌봄을 염려한 그는 이 권유를 번번이 물리쳤다.


부귀영화가 눈앞에 있음에도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했던 흔들리지 않는 효심. 후손들과 역사는 시류에 물들지 않는 학자로서의 이러한 기개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낮은 자세로 임한 인조의 됨됨이를 함께 기리고 있음이리라.



삼고(三顧). 두 글자를 내 앞에 놓는다. 막대 위에 얹어진 버나처럼, 내게 지나간 몇 번의 아슬아슬한 위기를 떠올린다. 그때마다 자신을 향해 청했던 문답.


결혼은 왜 하는가.

행복하려고 결혼한다.


왜 이혼하는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한다.


이혼하면 행복해지는가?



가정은 가족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이 깨어지면 담는 기능을 상실하듯이 가정도 하나의 간증을 잃으면 온전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지 않을까. 구시대적인 발상에 멈추고 있다 하더라도 젊은 시절 나는 이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래서 번번이 가문의 영광(?)을 택했다. 스스로에게 바치는 삼고초려의 자세로.


萬古消磨應是夢(만고소마무시몽). 지나간 일은 한갓 꿈과 같다. 끝도 없는 상념을 마무리하듯 주련의 글귀 한 줄이 내 마음을 붙든다. 분답했던 생각도 잠잠히 잦아든다.



낭랑한 물소리를 따라 정자 왼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열네댓 가락의 물줄기가 악기의 투명한 줄처럼 일정한 간격을 가지며 수석 위로 떨어진다. 부딪혀 나는 이 소리를 일컬어 ‘명옥헌’이라 이름 하였나 보다. 녹음 버튼을 눌러 물소리를 담는다. 마법의 호리병처럼 온갖 소리가 빨려 들어간다.



옥구슬 부딪치듯 낭랑한 물소리, 푸념 겹도록 지절대는 새소리, 마른 배롱나뭇가지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소리, 바쁘게 세월 지나가는 소리... 끊임없이 리플레이 되는 소리에 취해서 마음은 아직도 명옥헌 원림을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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