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마저 짧아서 외로운 정오. 창호지 한 입을 베어낸 듯 반나마 남은 낮달이 서쪽하늘에 떴다. 두어 점 구름에 몸을 가리고 해님과 숨바꼭질하며 시간을 긷나 보다.
안내 팻말을 발견하고 우연히 들어서게 된 망우당의 생가. 찾는 이 없는 너른 공터에 오도카니 홀로 선 내 머리 위로 내려앉는 햇살마저 적막하다. 생가 둘레로 조성된 공원 한 편에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오른손에 움켜쥔 허공을 찌르는 물체 하나가 시야에 잡힌다. 좁고 긴 것이, 그 끄트머리에 응축된 기상도 예사롭지 않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꼿꼿함이,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기개가 손아귀를 타고 움큼 차게 솟구쳐 오른다.
검劍이 아니라 등채다. 등채는 물들인 사슴 가죽이나 비단 끈을 등나무의 굵은 도막 끝에 달아 사용한 지휘봉이다. 자세히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면 예사로 보아 넘겼을 것을, 등채에 마음이 붙잡혀 오래된 시간 속을 바라보고 섰다.
등채는 시그널이다. 이심전심의 신호다. 혼자 하는 일에는 필요 없고 둘 이상 함께 할 때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도로에서 깜빡이 불로 소통하는 자동차와의 신호, 감독과 운동선수 사이의 손가락 신호, 좁은 전용도로를 줄지어 달리는 바이크끼리의 신호, 심지어 하늘을 나는 말 못 하는 새들까지도 시그널로써 그 뜻을 전달하고 알아차린다. 장군의 등채는 북소리와 함성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선봉자의 뜻을 전하기 어려울 때 군사와의 소통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한 길, 한 생각, 한 가치, 한 목적을 가질 때만이 테트리스 배치처럼 틈이 없이 끼워지는 법이다.
사비를 털어 의병을 일으키고 백의종군으로 말을 몰아 적군을 향해 돌진한 장군. 말안장을 힘껏 누르고 있는 발끝에서부터 다리로, 가슴으로, 어깨로, 휘날리는 붉은 옷자락에 이르기까지 자라목을 힘껏 빼고 동상을 천천히 톺아 간다. 나부끼는 그날의 깃발, 뭉클뭉클 일어나는 흙먼지, 우렁찬 북소리, 왜군을 향한 진격의 함성들… 등채를 휘두르며 하늘을 찔렀을 천강의 기상이 눈앞에 선연한데 기마는 마치 날개를 달아 지금이라도 출격할 듯하다.
세상과 맞지 않아 끝내는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다던 장군의 마음일까. 코로나로 인해 망우당 생가의 솟을지붕 아래 대문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뒷짐을 지고 고망 산을 바라보며 시름 깊은 걸음으로 오래오래 앞마당을 거닐었을 망우당. 그를 떠올리며 기와가 얹힌 토석 담 너머로 까치발을 하고 기웃댄다.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형태라는 일곱 동의 집채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을까. 안채, 사랑채, 별채, 곳간채, 행랑채… 직접 둘러보지 못한 영웅의 체취가 그리워 못내 아쉬움이 남는데 객의 마음을 읽었는지 뼈 소리를 내는 나뭇가지가 담장을 건너와 팔을 흔들댄다.
더듬이를 잃은 곤충처럼 갈 바 몰라 섰다가 걸음을 옮겼다. 생가 대문 바깥 너른 마당 한 편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세월을 눕히고 섰다. 수령 육백 년이 넘은 고목이다. 현재와 과거 사이에 부유하는 시간을 끌어당긴다. 태곳적 동네 아이들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장군의 어린 시절에도 이 아름드리나무는 마을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었을 터. 옛적에는 숨바꼭질이며 골목대장 놀이에 해지도록 함께 놀아주던 아이들의 좋은 벗이자 버팀목이지 않았을까. 이제는 긴 장대에 기대어 세월을 지탱하는 해묵은 나뭇가지에서 영웅을 떠나보낸 쓸쓸한 발자취를 찾아낸다.
‘가라’와‘오라’의 의미 차이를 입속에서 사탕처럼 녹여 읽는다. 가라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오라는 아무나 할 수 없다. 오라는 말에는 화자가 반드시 앞서 간 위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본(本)이 된다는 뜻으로 어떤 것의 본보기가 되어야 선구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내로남불’로는 정말 곤란하다. 지금 이 시대에는 누가‘오라’ 외칠 수 있는가. 가라는 없고 오라만 있었던 망우당의 삶이 다시금 빛나 보이는 까닭이기도 하다.
우포를 돌아 나오는 길에 향방을 잃고 헤매다 맞닥뜨린 장군의 생가. 아는 것과 직접 본다는 것의 차이를 생각한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차이에서 오는 앎이란 얼마나 다른 것인지. 책에서 본 것으로 안다고 생각하고, 체험해 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오류를 깨닫는다. 그리고 사백 여 년을 거슬러 이제야 느끼게 된 옛 영웅의 발자취를 그리며 출세를 위한 출병이 아니라, 충정에서 등채를 들었던 장군의 민족애에 절로 숙연해진다.
느린 시간 밖으로 걸어 나오는 길. 광장을 휘감는 바람이 머릿결을 가른다. 개간 리에 살아 숨 쉬는 나무와 돌과 흙 그리고 하늘이 하나로 얼크러진다. 무심코 뒤돌아보는데 등채를 움켜쥔 손이 여전히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