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씨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좀 심하게 축약시킨 느낌이 있긴 하지만 부정적인 성향의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언제나 이 말을 건넨다.
책 한 권, 글 한 줄을 읽다가도 인생 전체가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말씨를 바꾸면 내 인생도 바뀌지만 남의 인생까지도 바뀐다는 것을 신앙처럼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해는 휴전된 이듬해였다. 그 시절 어린 아이들의 먹거리란 흔치 않을 때였지만, 심통나는 일이 생기면 반항할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무기는 밥을 안 먹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어머님한테는 안 통했다.
‘입이 밥 빌러가지, 밥이 입 빌러 가냐?
빨리 안 먹냐!’
이런 으름장이 전부였고, 내 손을 이끌어 직접 밥상머리로 데려가 주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 때면 나는 하수도 물 빠지는 소리를 내는 배를 움켜쥐고, 끝내 고집을 부리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하곤 했다. 다음에 자라면, 따스한 말을 할 줄 아는 따뜻한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개인 진로상담이
있는 날이어서 나는 교무실로 불려 갔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국문학과에 갈 것을 먼저 권하셨다. 그때 나는 명예와 경제성이 있음 직하게 여겨지는 경영학과는 어떠냐고 여쭈어 보았는데 선생님은 한 마디로 싹둑 잘라 말씀하셨다.
“여자가 무슨 경영학이고?”
그때만 해도 여학생이 경영학과에 가면 홍일점을 운운하는 시대이긴 했다.
하지만 ‘여자가 무슨’ 이란 이 한 마디 때문에 나는 성향에도 맞지 않는 경영학과에 진학하는 객기를 부렸고, 평생에 하고 싶어하던 국문학은 세월에 밀려 전전긍긍 늦깎이로 공부한 인생 최대의 아쉬움과 후회를 남기게 되었다.
언어적 감각에 민감한 편인 내게 국어국문학은 감미롭기까지 했고 언어 감각도 한층 더 예민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한국어는 굴절어의 특성상 조사가 발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조사 하나만 다르게 사용해도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사용했던 것에도 그 언어에 깃들어 있는 심리적인 작용이나 상태를 생각해 보고 사용하게 되었으니까.
대표적인 예로 ‘-나’를 들 수 있다.
두 문장을 대조해 보면 의미의 다름이 분명하다.
영화를 보러 갈까?
영화나 보러 갈까?
앞의 말은 목표가 분명하고 그에 따른 행위도 선명하지만, 뒤의 말은 목적의식이 느껴지지 않아서 하릴없는 사람의 행위같아 보인다.
따라서 이미지 관리를 하려면 ‘영화나 보러 갈까’ 가 아닌, ‘영화를 보러 갈까’로 바꾸어 사용하게 되었다.
대화를 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말한 의도가 상대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었다면 내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데 먼저 탓을 두어야 한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느니,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느니 하는 말은 오해가 생긴 다음에는 이미 무효하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눌 때 화자보다는 청자가 '갑'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듣는 사람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입을 여는 것은 소통의 단초가 될 뿐만 아니라,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말이 꼬이지 않는다면 인생이 꼬이는 것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이 말은 내가 백만 번 공감하는 말이다.
'말씨를 바꾸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