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주부로서 지난날 나는 집에 와도 휴식이 없는 삶을 살았다. 하루 일의 종료는 쓰러져 잘 때라야 비로소 끝이 났으니까.
그 잔재가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탓일까. 지금은 프리랜서로 한가한 시간을 누릴 수 있음에도 여전히 성급하고 조급한 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늦추기 1
저녁식사 후 주방 설거지를 할 때만큼 지루한 시간이 있을까. 모두들 밥을 먹고 나면 제 방으로 돌아가고, 어쩔 수 없이 내 몫인 뒷설거지에 혼자서 얼굴을 한 자나 늘인다. 부글부글 끓는다고 해야 하나. 나도 어서 방으로 가서 쉬고 싶은데 씻어야 할 그릇은 날마다 왜 그렇게나 많은지.
왜 이러지, 깨닫는다.
방으로 가서 쉬는 게 이제는 그리 절실하지도 않은데. 딱히 방에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지난 습성을 못 버리고 있다. 생각에 이르자, 소리 내며 끓어오르던 마음속 수포가 일순간 잠재워진다. 천천히. 느긋하게. 하나씩!
#늦추기 2
횡단보도가 저만치 보이는 길에서 초록불이 켜지는 걸 본다. 애써 뛰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 뛰지 말아야지. 지금 반드시 건너가야 할 이유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초록불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에 묶여서 죽어라고 뛰다니...
느긋하게 걷기를 시도한다.
다시 빨간불로 바뀌려는 깜빡이 신호등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섰다. 천천히. 느긋하게. 최대한 여유를 부리며.
#늦추기 3
길을 바삐 걷던 습관도 고치기로 한다. 목적지에 좀 천천히 도착하면 어때.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고 정해 놓은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날 이후 보도 옆에 피고 지는 꽃들이 내 눈에 스캐너 되기 시작했다. 늘 변함없이 서 있던 가로수도 달라 보였고 어제의 나무와 오늘의 나무가 다르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가끔은 잎새를 만지며 잎맥을 촉감으로 느껴보기도 하는 여유란 얼마나 설레는 것인지!
# 꼭 그래야 할 이유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닌데 기어코 서두르는 것. 그것에서 탈피하여 한 템포만 늦추면 좌불안석이던 마음은 세상에 다시없는 편안한 상태가 된다.
일의 시작과 끝내기까지에 있어서도, 누구를 기다려 줄 때도, 미용실에서도, 퇴근한 남편이 나보다 먼저 집에 와 있을때도,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잠 오기를 기다릴 때에도.
또, 또, 또.....
마침내 세상이 바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