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관음증이랄까. 거리두기에 익숙해지면서 카톡 프로필 사진을 통해 지인들의 일상을 엿보는 일이 잦다.
그런데 어쩜일까. 이미지 공간에 궁금한 지인은 없고 토끼처럼 귀엽다는 손주들의 일상만 가득한 것이 어째 좀 못마땅하다. 여자에게는 나를 포기하는 유전인자가 애당초 칩처럼 저장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모성애에 길들여져 기꺼이 잃어버리기를 즐겨하는 것일까. 자녀들이 장성하거나 독립한 이후에는 '나'를 되찾아 볼 시간도 필요하련만 외려 나이 들면서 할머니 역할 하나가 더 얹어졌다.
신체는 자꾸만 쇠락해 가는데 젊어서 자식 키울 때처럼 또다시 돌보고 키우기를 반복해야 하는 셈이다. 손주 키우는 재미보다 왠지 이 일이 은퇴 없는 노동자처럼 생각되는 나는 아직 할머니가 못 돼 본 탓일까. 아무튼 엄마의 과제는 끝이 없어 뵌다. 엄마도 사람이라 좋은 것도 갖고 싶고, 즐기고 싶고, 쉬고 싶은 욕구가 있을 터인데 맞지 않는 신에 발을 구겨 넣어 맞추듯, 언제까지나 맞추기에 열중하여 구겨진 채 살아야 하는 걸까.
엄마라서 말고 그저 나여서 하는 것.
'다워야 한다'는 묵은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 역할이 주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는 '엄마'라고 불리고 '나'라고 대답하기로 작정했다.
내가 해 줄게.
내 방으로 건너와.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없어.
내가... 내가... 내가...
언어가 바뀌면 생각도 바뀔까. 관계, 입장, 인식, 도리, 체면, 헌신, 뭐 이런 것들이 주는 지극히 윤리적인 중압감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