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김두선 | KBS 제2회 ‘내 마음의 선생님’ 전국공모전 수상

by 김두선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금아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인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러나 어디 남녀의 인연에만 이런 연정이 있겠는가. 내게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된,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게 된 연정이 있다. 해마다 오월이면 더욱 찾아드는 아련한 그리움, 바로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과의 인연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선생님을 세 번 더 뵈었다. 중학생일 때 맞은 스승의 날 세 번이다. 이후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는 어느 여름날 오후, 따가운 햇볕을 피해서 얼굴을 숙이며 걸어가고 있던 하교 길이었다. 맞은편에서 급하게 걸음을 멈추며 반갑고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돌콩아."


이것은 '작고 당차다'는 뜻으로 6학년 담임 선생님이 내게 지어주신 별명이다. 아, 선생님! 순간, 거의 반사적으로 학교 배지를 손으로 가리며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 흙먼지가 나도록 정신없이 뛰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어딘지도 알 수 없는 후미진 골목으로 숨어 들어가 안도의 숨을 내쉴 때쯤, 목구멍 저 아래에서 뜨거운 울음 덩어리가 솟구쳐 올랐다. 한동안을 담장에 기대어 서럽게 울던 나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명문 고교의 진학에 실패했던 부끄러움을 씻고 명문대에 입학하면 그때에 선생님을 당당히 찾아뵈리라고. 하지만 나는 이 다짐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아니 그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에 위치한 동신 국민학교이다. 1960년 3월 2일. 나는 지금도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신학기 첫날, 교실에 들어오시는 그분의 한 손에는 출석부가, 다른 편 겨드랑이에는 예닐곱 개쯤 되어 보이는 고리 달린 회초리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묵묵히 칠판 옆 벽에 큰 못 하나를 박으시고 회초리를 한데 걸어두신 다음, 칠판에 '윤 희 백' 이름 석 자를 크게 써 두시고 말씀하셨다.


"인생의 첫 관문인 중학교 입시를 치르는 날까지 너희를 위해 준비한 이 사랑의 매는 한 개씩 부러지게 될 거야,"


명문 여자중학교 합격을 염두에 둔 선생님의 육중한 이 한마디는 새 학기 새 반 분위기에 들떠 있는 우리를 단숨에 제압했다. 새 학기 첫날의 과제는 국어 교과서 첫 단원 제1 장을 몽땅 외워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한 학년 동안 서로를 신뢰하는 약속의 징표로 이 말도 안 되는(?) 숙제를 내어주셨다. 숙제를 받은 아이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하거나 수군거렸다. 아니, 제1 장을 통째로 다 외워오라니!



그날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회초리가 겁나서 해냈다. 제1 장 전화놀이. ‘따르릉.’ “여보세요, 네. 윤관입니다.” 어슴푸레하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첫 구절이다.


다음 발표 날, 반에서 몇 안 되는 약속을 지킨 아이들 부류에 나는 속했고 선생님의 관심은 이렇게 시작됐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이란 것을 처음 들었다. 힘이 났다. 교과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예습이란 걸 처음 했다. 육 년째 학교를 다녔지만 6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서야 나는 비로소 학교생활의 즐거움을 알게 됐고 공부다운 공부를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남학생은 1반부터 6반, 여학생은 7반부터 12반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중고등학교도 입시제도가 시행되던 때였다. 아이들의 일 년은 '수난'이었다. 숙제를 하지 않을 때면 따끔한 회초리 맛에 두 손바닥을 호호 불며 비벼댔다. 시험문제를 매길 때는 틀린 개수만큼 맞아야 했는데 그때마다 손바닥이 빨갛게 부어올랐고, 벽에 걸린 회초리는 하나씩 부러져나갔다.


선생님은 여자 아이라고 봐주는 법이 절대 없었다.

“너희가 살아갈 사회에 나가면 여자라고 봐주지 않는다. 당당한 사람이 되려면 여학생이기 이전에, 먼저 한 인간으로서 그 값을 똑같이 치를 줄 알아야 한다.”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회초리를 들기 전 선생님은 언제나 이 말씀을 앞세우셨다.


그 시절 나는 만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공책은 맨 뒷장에서부터 앞쪽으로 엮어가는 만화 작업이, 앞쪽에서 차례로 적어가는 필기의 분량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메워졌다. 이런 나에게도 회초리가 주는 약발은 기막히게 먹혔다. 그 맛을 한 번 본 이후로는 수업 시간에 장난질했던 만화 작업이 한 방에 끝이 났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없는 성적을 일 년 동안 받게 되었으니까.




그 시절에도 시쳇말로 금수저와 흙수저는 엄연히 존재했다. 물론 흙수저인 나는 5학년까지 학급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아이로 자랐다. 자연히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칠판 옆에 걸려 있는 회초리는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첫 시험을 치렀다. 과목 점수가 백점이거나 백점에 가까운 점수가 나왔다. 두 번째 시험을 치는 날, 선생님은 내 곁에 가까이 오시더니 책이 든 가방을 책상에서 꺼내 선생님 탁자 앞으로 갖다 두라 하셨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후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첫 시험 결과가 전에 없이 잘 나오자, 5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커닝’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셨단다. 그래서 나만 가방을 빼서 앞에 두게 했는데 시험 결과가 여전히 우수한 걸 보니, 무조건 믿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셨다.



나는 전혀 서운하지 않았고 오히려 의심을 받을 만큼 달라진 내 성적이 자랑스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이후 선생님은 나를 불러서 과외반 아이들 틈에 넣어 주셨다. 과외비를 내기에는 가정 형편이 어렵다고 거절했더니 나는 너한테 돈을 가져오라고 한 적이 없다, 하시며 너는 무조건 오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



몇 번 버티다가 선생님의 진실한 설득 앞에서 결국 염치없는 내 걸음은 선생님 댁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때는 학교 선생님도 과외지도가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과외수업은 예순 명이 넘는 학교 수업과는 달리 오붓하고 재미있었다. 더구나 난생처음 그 '과외'라는 것을 받으니 얼마나 좋았던지!


선생님은 신이 난 내 마음에 불을 지피듯, 이거 한번 풀어 볼래, 하시며 문제집 한 권을 건네주셨다. 넙죽넙죽 받을 때마다 매주 한 권꼴로 풀어내는 속도전에 이번에는 선생님이 신이 나셨는지 6학년 내내 책을 공급해 주셨다.



한 번은 열 시를 조금 지난 저녁시간, 사모님께서 당신의 어린 두 아들을 먹인다고 계란 프라이를 하다가 한바탕 소동이 난 적도 있다.


"애들이 한참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데 음식 냄새를 풍기면 공부가 되겠어? 지금 이 시간에 이런 걸 꼭 해야겠냐고!"


벌떡 일어나 선생님이 급히 가신 부엌 쪽에서 프라이팬이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소리가 났다. 밤이 이슥해서 한참 졸릴 때면 선생님은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을 모두 마당으로 데리고 나갔다. 잠을 깨운다는 명목이었지만 조를 나누어 각각 팔 굽혀펴기, 넓이 뛰기, 야구공 던지기 자세 등 사실상 체력장 준비를 위한 맹훈련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달밤에 체조'다.



뒤에야 안 것이지만 나를 비롯한 거의 절반의 학생들은 집안 사정이 넉넉지 못하여 선생님이 대가 없이 가르쳐 주셨고, 과외 중에 간간이 나누어 먹었던 삶은 고구마며 과일들은 그 고마움에 보답하는 어머님들의 응원이었다. 내 어머님도 붉게 익은 사과 한 보따리를 사서 두어 번 넣어주신 기억이 난다.




선생님의 공부 열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소풍날도 공부는 계속된다. 전체 장기자랑이 있기 전 시간까지 점심을 일찍 먹인 선생님은 우리 반만 가장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사회 책에 나오는 주요 연대표를 줄줄 외우게 했다. 오른손으로 정수리를 짚으며 왕검의 고조선 멸망 108년부터 시작된 연대표는 신체를 훑어내려 발에 이르러면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끝으로 끝이 났다.


여러 교과목 중 자연에서 가장 기억이 선명한 단원이 있는데 그것은 ‘사철과 책력’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특히 경도와 위도를 통해 날짜와 시간의 차이를 계산하는 문제는 도무지 알쏭달쏭했다. 당연히 백점의 꿈은 매번 여기에서 산산조각 났다. 안타깝다 못해 화가 난 선생님은 급기야 나를 교장실로 보내어 커다란 지구본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가 그려져 있는 위치에다 긴 막대기를 푹 찔러 넣으시며 막대 끝이 나오는 반대쪽을 살펴보라 하시고 날짜와 시간의 변화를 설명하셨다.


"이래도 모르겠나?"


선생님의 고함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생각해 보면 나 때문에 못 쓰게 된 그 지구본을 선생님은 호주머니를 털어서 다시 사 두셨을 텐데...



극적인 일은 일 학기가 끝날 즈음에 일어났다.

그날 우리 반은 한 학기 동안 배운 내용 전부를 테스트받았는데 선생님은 불합격한 친구들을 모두 데리고 학교 화장실 뒤편으로 가셨다. '

벌 받을 장소가 화장실 주변?'

우리는 모두 킬킬대고 웃었다. 하지만 대열을 정돈시킨 선생님은 엄숙한 표정으로 당신의 흰 와이셔츠 소매 한쪽을 바짝 말아 올리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한 학기 동안 테스트한 결과가 몹시 좋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 담임 선생님인 내 죄가 크다. 내가 너희를 충분히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너희들만 이런 벌을 받는다면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가만있지 않으실 것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이 벌을 받겠다. 그 후, 너희도 나를 따라 한 사람씩 실행한다.”



키득거리던 아이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었다. 선생님은 바닥에 있는 분뇨 저장탱크의 뚜껑을 열고 무릎을 굽혀 앉은 다음, 당신의 걷어붙인 팔을 푹 담그는 것이 아닌가!

차례차례 세례(?)가 끝난 다음, 선생님은 그 팔을 옆으로 곧게 뻗히게 한 후, 세례자들을 데리고 수돗가로 향하셨다. 그러고는 직접 한 명씩 한 명씩 비누로 씻고 소독약으로 닦아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 날 벌을 받은 아이들은 철부지처럼 울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저 잘 길들여진 새끼 양처럼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를 뿐이었다.


분뇨탱크 사건 때 받은 충격이 컸기 때문일까. 2학기를 맞이한 우리 반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언제나 다른 학급보다 조용했다. 쉬는 시간에 밖으로 나가는 아이도 거의 없었다. 여름방학에도 우리 반만은 이른 아침 등교해서 두세 시간씩 학습을 계속했다. 긴장을 늦출 새가 없었다.




6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와는 13살 차이가 나는 오빠의 결혼식이 있었다. 나는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웬걸. 첫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두 명의 반 아이가 나를 데리러 왔다. 선생님의 명령이었다. 울상이 되어 교실에 들어서자 선생님은 나를 불러서 조용하면서도 엄하게 꾸짖으셨다.


"네 인생이 걸린 문제다. 중학교 입학시험은 네 첫 번째 관문이다. 오빠가 네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인생이 걸린 문제 앞에서 최선이 아니면 좋은 결과는 절대 없다."


하루 결석하는 것이 좋아서 잠시라도 기뻐했던 내 행동이 부끄러웠다. 그때 선생님의 꾸짖음이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던 것은 스승과 어린 제자의 마음이 하나로 통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푹푹 찌는 선생님의 열정에 삶겨서 열세 살의 동심은 공부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갔고, 마침내 우리 반은 부산 전체에서 명문 여자중학교에 '최다 합격생'을 배출한 학급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졸업을 맞이했다.



내가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스멀스멀 떠올리게 된 것은 강단에 서는 직업을 갖게 되었던 어느 한 시점이었다. 그때 수소문해서 겨우 알게 된 소식은 선생님이 우리 학년을 졸업시킨 후 두 해를 초등학교에 더 머무셨다는 것. 중학교 입시제도가 없어지던 해, 어느 고등학교 교사로 전근 가셨다는 확인될 수 없는 소문이 전부였다. 안타까웠다.


선생님과의 6학년 한 해를 통하여 나는 두 가지의 세상사는 법을 배웠다. 하나는 삶이라는 과제 앞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힘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최선의 기준을 배우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누며 사는 것이다. 그분은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를 차별하지 않으셨고, 관심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목표와 열정을 나누어 주셨다.


최선을 다하며 살 것과 나누며 살 것. 세상을 보는 창이 되었던 이 가르침 속에서 선생님의 따뜻한 그림자는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내 마음에 투영된 화석이 되었고, 그분만이 나의 참스승으로 평생을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그분이 실천하신 사명감, 제자 사랑의 마음, 그 따스한 헌신을 이 시대에 찾아볼 수 있을까. 지금의 학생들은 이런 회초리와 벌을 기꺼이 받을 수 있을까....... 사표(師表)가 된 그분을 통해 내 안에 뜨거운 바람이 인다. '청어람'은 못 되더라도 선생님이 가르쳐준 두 가지 과제 앞에서 사는 날 동안 끊임없이 열망을 가지고 살 터이다.




나는 지금 몇 명의 지인들과 어르신 한글교실을 무료로 열고 있다. 서른 명 남짓 되는 어머님들 중에는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고 싶다며 검정고시 준비를 하시는 분도 있다. 스승께서 그리하셨듯이 책도, 회비도 모두가 무료봉사이다. 학습자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일흔이 훨씬 넘은 연세도 있지만 이제 쉰 살을 갓 넘은 학습자도 있다. 반짝이는 눈빛이 있다는 것. 그것은 열정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아직 젊다는 뜻이다.


신이 나서 가르치는 내 모습에 선생님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리워하는데도 못 만나게 된,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게 된 인연의 골..... 오는 주말에는 선생님과 함께 했던 추억 어린 그 교정에라도 가볼까. 내 어머님이 소쿠리 가득 담아 보내셨던 홍옥 사과처럼, 진하게 익어가는 스승에 대한 사랑을 빈 운동장에서라도 소리 내어 고백해 보고 싶다.


'한 번은 뵙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