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뇌는 부정적인 것을 오래 기억한다고 하는데 굳이 그렇지 않아도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나 보다.
참으로 오래된 일이건만 그 옛날 두 편을 동시 상영하던 영화관처럼, 비 오는 날이면 나 말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도 아직도 생생히 기억되니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로 인해 내가 되새김질하게 되는.
80년대. 당시 유행했던 롱부츠는 부드러운
피혁 소재로 다리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스타일이었다. 여름에도 비 오는 날이면 나는 시커멓고 무거운 장화보다는 무릎까지 오는 이 롱부츠를 즐겨 신었다. 한 번은 이웃하는 학원에 들렀다가 그곳 교사와 첫 대면을 하게 됐다. 용건을 설명하는 나를 향한 그녀의 눈은 연신 내 신발에 가서 멈춰 있었다.
그거, 혹시 부츠 아니에요?
네, 장화 대신 신고 다녀요.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그녀의 눈빛이 순간 뜨악했다. 요즘처럼 여름용 패션 부츠가 있을 때도 아니었으니, 여름에 겨울 부츠란 납득 불가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지금 올케와 사촌 시누이 사이이다. 거의 사십 년 지기. 반복되는 테이프처럼 그녀는 요즘도 자주 그날의 너스레를 떤다. 비 오는 여름날, 겨울 롱부츠 패션의 기이한 여자에 빠지다 정신 차리고 보니 오늘까지 발목 잡힌(?) 신세가 되었다고.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양복에 삿갓을 쓰든 서양 사람들처럼 남의 일에 무관심했다면 이런 해프닝은 없었을까...
장마가 시작된 첫날, 장화를 챙겨 신고 나서며 별스런 인연을 만들어준 옛날이야기에 다시 웃음이 번진다. 그러고 보니 요즘처럼 한여름에 신는 패션 롱부츠는 아마도 내가 선구자인 셈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