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창조성과 협력성, 일체감을 위한 노래와 몸짓
춤을 출 때의 기쁨은 창조의 기쁨이다. 춤에 창조성을 불어놓을 수 없다면 기계적이고 지루한 춤이 될 뿐이다. 만약 우리가 춤을 출 때, 즉 즐거움을 맛볼 때 자유롭지 못하다면 어찌 인생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자유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독자적인 스텝을 고안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종교, 교육, 정치 등에서도 독립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베토벤과 재즈 중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가 그 사람의 인생이 행복하게 되거나 불행하게 되는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만약 많은 학교에서 베토벤 대신 재즈음악을 가르친다면 보다 큰 교육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36년 동안 아이들과 제대로 춤을 출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난우중학교에 근무하던 93년이었다. 학년말시험이 끝나고 상급학교 진학 준비도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요즘 말하는 전환기 수업을 당시에 통합수업으로 진행했었다. 12개 학급을 3개조로 나누어서 활동을 했었다. 3학년 담임을 맡았던 교사들과 교과 담당교사들이 협력하여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아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만한 커리큘럼을 짜서 아이들의 시간을 엮었다. 그중 하나가 무용실에서 김정희 선생이 지도하여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남녀가 원을 만들어서 춤을 추며 서로 인사를 나누며 춤을 추는 것이었는데, 생활 속에서 춤을 추어보지 않은 아이들은 어색한 몸짓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불안하고 어색해했지만, 동작이 어려운 것은 아니어서 아이들은 곧 익숙한 동작에 춤으로 끌려 들어갔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이들도, 나도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춤이 교육과정으로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2012년 홋카이도를 여행하던 중에 야간에 오오도리에서 보았던 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임시로 엮어진 3층 무대에서는 북과 같은 타악기가 연주되고, 2층 무대에서는 관악기가 연주되는 가운데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주 단조로운 리듬이었지만 힘이 있었다. 무대 밖에서는 사람들이 원을 돌며 춤을 추는데, 춤의 동작도 아주 단조롭지만 어떤 기운을 모으고 있었다. 관광객들도 원이 되어서 함께 춤을 추게 만들었고 나도 그랬다. 춤을 추는 동안 무대에서는 노래와 악기의 리듬으로 기운을 돋우며 모아나갔다. 춤이 끝났을 때는 알 수 없는 일체감이 모두에게 남아 있었다. 그 춤을 경험한 후에 한국에서도 이런 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통 악기로 만들어낸 소리와 리듬, 단순한 몸짓이 어우러져 모두를 하나로 묶어내는 역동성이 있는 춤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도 북, 쇠, 장구, 징으로 이루어진 전통악기로 충분히 그 힘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태릉중학교에 근무하는 동안에 ‘천강유일’이라는 지역에서는 꽤 잘 나가는 학생동아리가 있었다. 그들의 춤은 노출을 원하는 조악한 성인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다소 불편한 몸짓도 섞여 있었지만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현재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비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과 내가 원했던 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고 잠시 고민을 해보았다.
93년 우리반은 매주 토요일 아침에 노래가 교실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흘러나왔다. 3주마다 새로운 노래를 익혀서 불렀다. 처음 토요일은 노래를 배우고, 다음 토요일은 익힌 후에, 그 다음 토요일에는 분단별로 노래를 불러서 잘 부른 분단에 선물을 주는 방식이었다. 예술고등학교에 진학을 할 임정선이 기타를 치면서 아이들에게 노래를 지도하였다. 나도 가끔은 기타를 쳤던 기억이 있다. 상급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교 3학년 교실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염려의 마음들이 교실 밖에서 들렸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토요일의 합창이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즐거웠다. 노래는 나와 정선이가 선곡을 했었다. 그 때 불렀던 노래곡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해 우리반의 모든 아이들은 다른 반보다 먼저 모두 고등학교에 진학을 확정했다.
2017년 1월 황선준 경남교육정보원장이 이끄는 북유럽교육탐방단의 일원이 되어서 덴마크의 프레네학교를 방문했을 때에 음악실에는 신시사이저, 기타, 드럼이 놓여 있었고, 마이크를 든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음악실에도 실용음악에 필요한 악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의 음악실은 아이들의 풍부한 감성을 끌어내기 위해서 아이들이 익숙한 악기들을 배치했다. 하지만 한국의 음악실에는 그런 모습이 없다. 피아노만 있을 뿐이다. 피아노만으로 아이들이 가진 음악성을 길러내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전통악기, 또는 아이들이 즐겨듣는 음악에 사용되는 현대적인 악기들이 함께 어울어지는 음악교육이 필요하다. 음악은 창조성, 협동성, 일체감을 익히는데 매우 중요한 과목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