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글짓기와 포스터 그리고 체벌
대중은 생각할 수 없고 오직 느낄 뿐이다. 범죄자는 대중에게는 하나의 위험이다. 사람들은 이 위험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어서 손쉽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우리의 낡은 형법은 근본적으로 불안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억압적인 교육제도도 이와 같이 근본적으로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새로운 세대에 대한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의 생각과 가치들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무거운 죄이다. 한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바람직하지 못한 습관을 가르치고, 그렇게 형성되게 하고, 벌을 주겠다고 위협하고, 강압을 하는 것 등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참된 자유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할 뿐이다.
어린이들은 자유에 대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 영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어린이들은 여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얻는다. 그 징후는 어린이가 더 정직해지고 더 사랑스러워지고 공격성이 줄어든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만약 어린이들이 불안이 없고 학과 공부에 억눌리지 않는다면 대체로 그들은 공격적이 되지 않는다.
서머힐에도 남들을 지배하려는 어린이는 항상 있었다. 가정에서의 나쁜 영향이 이곳의 많은 자유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후 5개월이나 5년에 걸쳐 형성된 성격적인 특성이 자유에 의해서 달라지는 수는 있으나 그 반대로 변하는 경우란 절대 없다.
우리는 어린이에게 개인주의자가 되는 것을 용납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어린애다운 관심을 어린 시절 전체를 통해서 자유롭게 추가해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어린이의 개인적인 관심과 사회적인 관심이 충돌하게 되면 그들은 조용히 개인적인 관심에 우선권을 주게 마련이다. 서머힐의 이념은 해방, 즉 어린이들에게 자기의 자연스런 관점에 따라 살아가도록 허용해 주는 것이다.
교사가 된 첫 해에 송연이는 공격적인 아이였다. 그래서 친구들을 불안하게 했다. 아마도 불안한 가정에서 살고 있거나 학과 공부에 억눌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아빠가 된 송연이가 어느 날에 연락을 해왔다. 반갑고 미안했다. 송연이를 가르칠 때 나는 너무 젊었기 때문에 그가 겪었을 불안이나 공부에 억눌렸을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불안을 주는 공격성을 막아내는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교사의 마지막 해 재운이는 공격적인 아이였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아이들은 심하지 않은 친근감으로 포장한 폭력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퇴임을 눈앞에 둔,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재운이 가진 불안의 원인을 그로부터 직접 듣고 알아내는데 실패했다. 그가 대화를 원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더 자주 인정해주고 그의 생각을 더욱 허용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가끔씩 재운이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을 때는 슬며시 그의 공격성을 눌러주었다. 재운이 가지고 있는 불안, 억압의 원인을 그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었다면 재운은 더 많이 변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나와 헤어질 무렵 재운의 공격성은 많이 완화되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끄집어내어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갖도록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안타깝다.
1983년 당시 학교는 매우 억압적이었다. 매주 월요일에 추운 날이나 더운 날에 운동장에 아이들을 한 시간가량 ‘애국조회’라는 형식으로 벌을 주듯이 억압을 하고 있었다. 교사의 체벌은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나 역시 교사 첫 해에 무수히 많은 아이들에게 매를 가하거나 나의 손으로 아이들의 뺨을 때리는 일도 가끔 있었다. 나의 폭력으로 상처 받았을 많은 영혼에게 속죄를 해야 했다. 둘째 해부터는 매를 거의 들지 않았지만 이따금 아이들을 억압하기 위해 체벌을 했다. 곽노현 교육감이 당선된 이후 체벌 금지 조치를 시행했을 때 많은 교사들이 금지 조치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체벌이 없이 아이들을 어떻게 억압할 수 있을지 감당이 안 되는 교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아이들을 억압하지 않고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억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다른 방법을 고민해서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체벌 금지를 환영했다. 지금은 학교에서 체벌이 사라졌지만, ‘상벌점’이란 제도로써 아이들을 억압하고 있다. 전농중학교에 생활부장을 하면서 상벌점 제도를 운영하다가 태릉중학교로 학교를 옮겨왔을 때 상벌점 제도가 없는 것을 알고 처음에 당황을 했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을 어떻게 억압을 하지?’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이미 상벌점이란 억압 기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상벌점이 없이도 아이들을 억압하지 않고도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잘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교사들은 아이들을 억압하기 위한 방법에 고민하고 있다. 아이들이 버릇이 너무 없다고 하면서. 아이들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허용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전두환 군부가 정권을 찬탈하여 지배하는 시기에 아이들은 ‘글짓기’, 포스터 그리기, 표어 만들기를 자주 요구받았다. 박정희 독재 정권 시기에 초중고를 다녔던 내가 그래왔듯이. 어차피 학급에서 잘 쓰인 글이나 포스터를 하나만 제출하면 되었기 때문에 나는 한두 번 과제를 내주고 난 후에는 특정학생을 지목해서 글짓기, 포스터를 그리게 해서 제출했었다. 글짓기, 포스터 그리기를 통해서 아이들의 생각을 정형화하고 어른들이 원하는 생각에 길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신에 나는 글쓰기 지도를 했다. 이오덕 선생님들의 글이 담긴 책을 읽고, 아이들에게 자신의 생활을 담은 정직한 글쓰기를 쓰게 하였다. 나는 특정한 가치를 주입하지 않으려 했다. 글을 쓰는 활동은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는 활동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른들의 생각에 따라 글을 쓰는 것은 글짓기라고 불렀고,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는 활동을 글쓰기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글쓰기 활동을 불편하게 받아들였지만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5년쯤에 읽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하이타니 겐지로)은 아이들에게 글을 쓰는데 좋은 교재가 되어주었다. 책을 읽은 이후 나는 아이들이 글쓰기를 해야 할 때, ‘본 것, 들은 것, 한 것, 생각한 것’을 따로 따로 적어보고 그것을 조합해서 엮으라고 하였다. 그 결과는 늘 풍부한 글로 나타났다. 아이들은 글짓기가 아닌 글쓰기의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래서 학급에서는 학급일기를 쓰게 했고, 나중에 학급 문집으로 엮어서 나누어 가졌다. 지금도 가끔 당시에 반 아이들이 쓴 학급일기를 읽어보면 아이들의 생각이 글을 쓰는 동안 가다듬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학교의 수업에 있어서의 차이를 알고 있다. 자유롭게 살고 있는 모든 어린이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놀면서 보낸다. 그러나 일단 때가 와서 깨닫게 되면, 그들은 차분하게 눌러앉아 국가고시에 필요한 공부를 시작한다. 약 2년쯤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훈련을 받은 어린이가 8년의 재학기간에 걸쳐 배웠던 학과들을 마스터해 버린다. 인습에 젖은 선생들은 시험이란 꼼짝도 못하게 억눌러서 준비시켜야만 합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어린이의 자유에는 찬성해, 그러나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 어떤 책이나 신탁이나 권위에도 없다. 다만, 인격과 어린이라는 유기체를 신봉하는 약간의 부모와 의사와 교사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어린이의 인격을 위축시키거나 신체를 긴장시키는 모든 행위를 삼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권위를 신봉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진리를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자유롭게 자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관찰할 뿐이다.
고등학생이 된 대중이가 이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찾아왔다. “1학년 때 반에서 꼴찌를 했어요. 성적표를 받았는데 46명 중에 46등이더라구요.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어떻게 하지? 이렇게 생각하다가 누나에게 도움을 받아서 공부를 시작했지요. 이제는 중간보다 조금 나은 성적을 가지고 있어요. 3학년이 되면 상위권에 있겠지요.” 대중이는 중학교 때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활달한 친구였다. 성적은 고등학교 진학에 어려움은 없는 정도는 되었다. 공부에 집중하던 친구는 아니었는데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 자신의 성적이 바닥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분발해서 스스로 공부하기로 마음을 정하자 성적이 쑤욱 올라가고 있는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한국의 어린이들은 많은 억압 속에서 살고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개인에게 주어야할 많은 자유들이 억압받고 있다. 교실에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모여서 서로를 잘 모르는 채로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아간다. 학교에서는 생활규정이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억압을 하고 있다. 억압을 위한 다양한 틀들은 틀 안에 살아가는 아이들의 생각에 틀을 만든다. 아이들이 자라서 사회에 나갈 쯤에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할지 모르는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한국에서는 서른 살이 넘은 자녀를 집에 둔 부모들이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몰라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일찍부터 충분히 놀면서 자란 아이들, 억압받지 않은 아이들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스스로 판단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충분히 놀 수 있게 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디지털 신호들이 너무나 많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걷고 뛰고 만지고 만들면서 자라야 하는데 아이들의 몸을 틀 지우는 인공물이 너무나 많은 도시에서 어른들의 욕망과 뒤엉켜서 마음도 비뚤어진다. 집과 학교 밖에는 함께 놀 수 있는 또래 친구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기에 너무나 비싼 집값으로 보금자리 마련이 어려운 지라 결혼도 할 수 없고, 아이를 낳아 길러내려고 해도 비싼 사교육비 감당이 두려워 아이를 낳기도 두려운 세상이라 어린이들이 흔하지 않다.
그래서 나의 첫째 아이에게는 결혼을 앞둔 이년 전에 아들과 며느리에게 유럽에서의 삶을 권하기도 했다. 어디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 풀어야할지 모르는 한국, 삼십오륙년 전에 한국의 교단에서 읽은 책 서머힐이 주는 교훈은 교단을 떠난 오늘 읽어도 자유 교육의 필요가 여전히 매우 유효하다고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