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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나무 Nov 07. 2022

우린 함께 합을 찾아낼 것입니다.

서나무의 신앙고백

우리는 약 2년이라는 시간을 팬더믹으로 보냈습니다. 물론, 지나온 시간이기에 보냈다고 표현했으나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쌓여 우리를 만듦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려운 시간을 함께 보내며 배운 점이 있고, 느낀 점이 있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생겼고, 당연한 상식이 생겼습니다. 과정을 지나며 어느 정도의 결과를 도출해 낸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달라질 수 있으나,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 과정은 정-반-합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전에 정이라 생각했던 것이 팬더믹과 같은 사건을 만나면 반을 만들어내고, 과정을 지나 합이 되는 것. 합리적이고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소설을 쓸 때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제가 글을 배웠을 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쓰고 싶은 그 내용을 어떻게 쓸 것 인가를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구조란 단순합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입니다. 누구나 이 구조를 만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소설 하나는 뚝딱입니다. 물론,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각 단계를 깊이 있게 고민하고 적절한 연결과 사건 그리고 해결, 상징 까지도 고민해야 합니다. 인물을 구상하는 것은 더욱 어렵구요. 실습을 통해 습작을 만들고, 동료들과 합평하는 시간까지도 어려운 과정으로 기억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선생님을 우리들에게 새로운 소설 하나를 보여주셨습니다. 죄송하게도 제목이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하나의 사건이 아닌 여러 개의 사건이 엃히고 설켜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은 ‘서브텍스트’를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또한 구조는 단순합니다. 앞선 5단계의 과정은 그대로 있되, 같은 메시지의 다른 5단계를 다시 만들어 두 사건의 중첩시킨 후 함께 마무리되는 구조입니다. 이 또한 과정을 따라 뚝딱 쓰면 되지만, 더욱 어렵습니다.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두 가지 사건을 얽히게 만든 후 이해와 납득을 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브텍스트를 이용하는 이유는 우리가 전하는 주제를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앞선 정-반-합의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소설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들의 삶이란 하나의 정-반-합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각자의 삶에서 적게는 수 십 개, 많게는 수 만 개의 정반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납니다. 심지어 서브텍스트를 만들기라도 하는 듯이 모든 정-반-합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나만의 과정이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타인과 연결된 과정이 대부분이라 더 어렵습니다. 함께 과정을 지나 결과를 만들어야 하기에 참 어렵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줍니다. 과정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합이 이뤄지는 경우는 다행입니다. 과정을 지나온 것 이니까요. 그러나 동시에 반이 되는 경우는 인생이 송두리 째 망가진 느낌을 받습니다. 내가 살던 세계가 무너졌다는 웃픈 말이 생겨나는 순간입니다. 세상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시금 합을 찾아갑니다. 팬더믹처럼요! 이제는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도 됩니다. 무의식 중에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합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요. 합을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내야 합니다. 그래서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동시다발적인 정반합의 과정에서 동시에 반이 찾아왔대도, 우리는 마땅한 합을 찾아내야 합니다. 아니, 찾아냅니다. 함께하는 ‘정-반-합’의 과정이 사람이 가진 강한 힘이라 믿습니다.


저는 인생 2회 차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도 실수하고, 무너지고 셀 수 없이 많은 ‘반’을 발견합니다. 마땅히 ‘정’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생각과 신념이 무너집니다. 옳지 못한 순간들과 생각들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박살난 것들을 짊어지고, 희망을 품을 수 없는 탄식을 소유하며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씁니다. 합을 찾고 싶기 때문에 발버둥 치는 중입니다.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이기도 합니다. 함께 찾으면 더 정확하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합니다.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수준의 합, 나의 하나님이 예비하신 합이 무엇인지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제게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요나 본문을 통해 말씀을 들으면서, 목사님이 강조하신 부분은 이렇습니다. ’요나는 선지자였으나 단 번에 하나님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은 요나를 버리실 수 있으나, 기다리셨고 다시금 기회를 주셨다. 그럼에도 요나는 따르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아주 작은 순종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순종을 크게 사용하셨다.’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느낀 점은 하나님이 저를 크게 사용하실 거라는 안심이 아닙니다. 제가 요나보다 대단하다는 착각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저는 주가 일하심을 믿습니다.


갑자기 신앙고백을 글을 맺게 되어, 쓰면서도 놀랍습니다. 아마도 찬양 반주를 들으면서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설교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으나, 마음에 기쁨보다는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지난 참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들으며 기도하듯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힘이 없으니, 제발 우리들에게 마땅하고 타당한 합을 내려주시기를 너무나 바랍니다. 각자의 마음에 생겨난 반이 타당하고 마땅하게 합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으나, 어려울 수 있으나 나아지리라는 희망으로 그리고 따스함으로 서로의 과정에 거뜬히 참여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언젠가, 모두 함께 합을 찾아낸 그날 우리는 마땅히 기뻐할 것입니다. 언젠가 그날은 분명하게 옵니다. 우린 함께 합을 찾아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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