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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Jul 05. 2018

보이지 않아도 존재감이 강한 곳

SSS의 HHH를 찾아서_ 고스트 북스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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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빔과 노숀과 함께 경주에 가기로 했다. 경주 황성동, 황리단길이라 불리는 그곳은 얼마 전부터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땅값은 몇 년 새 10배 아니고 100배로 치솟았다.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문제가 남아있어도 천년의 고도인 경주에 그런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아주 오랜만에 경주의 수많은 릉들을 보고 싶기도 했다. 


경주에 가자는 말을 듣자 노숀은 말했다.


"경주? 요새 경주와 함께 대구랑 울산에 핫하고 힙한 데가 많이 생기고 있어!"


빔과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럼 경주를 대구랑 울산이랑 묶어서 가자!"

"좋아! 이건 HHH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이야. 힙, 핫, 헤리티지. 우리 이름의 앞글자도 SSS야."

"대박. 이건 SSS의 HHH를 찾아서!"


우리는 리액션 봇이기도 하지만 예매왕들이기도 해서 일사천리로 교통수단과 숙박 예매가 끝이 나고, 결국 출발 날짜가 다가왔을 때 노숀은 우리에게 물었다.


"우리 근데 왜 대구랑 울산을 가는 거야?"

"네가 가자고 했잖아!"

"내가? 아."


노숀은 기억을 잃었다. 그 상태로 우린 버스에 올랐다.




1


어렸을 때부터 책방이 좋았다. 엄마와 함께 서점에 가면 내가 몇 권을 골라오든 모두 다 살 수 있었다. 보통 대형 서점에서 책을 샀었지만 때로 헌책을 공간에 가득 쌓아두고 파는 헌책방 거리에 가기도 했고,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에는 책을 도매로 파는 서점들도 종종 갔다. (신간을 정가의 30%에 사곤 했다.) 뿐만 아니라 동네에 있었던 책방의 단골도 되었다. 보통 비디오와 같이 책을 빌려줬는데, 한창 잘 나갈 때에는 책만 취급하는 책방도 있었다. 만 원을 선금으로 넣어두고 등하굣길에 책을 잔뜩 빌려서 집에 왔다.


아마도 나는 책의 냄새를 좋아했던 것이다. 인쇄된 종이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향. 그 때문에 아직도 책을 살 생각도 없으면서 일단 책방 문을 열고 들어선다. 괜히 책을 뒤적거리면서, 책이 가지고 있는 향을 맡는다.



요새 독립서점이 많이 생겼다.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빠르게 많이 생기는지, 열심히 쫓아다녀도 도무지 다 다닐 수가 없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각자 다른 매력과 장르로 강하게 어필 중이다. 서울시는 이제 책방 지도를 2회째 만들어 출간했다.


독립 서적의 세계가 점점 커지며 더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굳이 출판사의 검열을 거치지 않더라도 아주 내밀한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었다. 개중엔 정말 유명해져서 출판사와 계약해 출간한 책들도 있다. 그래서 개인적인 추억 기록으로 글을 써서 제본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출판을 노리는 사람들의 또 다른 연습의 장이 되기도 한다. 네이버 웹툰의 베도 같은 곳일까.


독립 서적은 때로 제본된 퀄리티가 좋지 않다거나, 편집이 서툴다거나, 맞춤법이 틀리는 것과 같은 미숙한 점이 때로 보여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이야기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듣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에 멈추지 못하고 계속 책을 사들이고 있다. 그런 느낌은 아마도 정말 누군가의 손을 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마치 일기처럼.




2


대구에서 우리는 고스트 북스에 들렀다. 독립서점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는 서울과는 다르게 아직 다른 지역에서는 독립서점이 많지 않다. 제주도엔 꽤 많이 생겼다고 들었지만.



엘리베이터도 없이 오래된 건물의 3층. 각종 포스터와 스티커가 잔뜩 붙은 안내 표지를 따라 서점에 들어서자 아담한 사이즈의 흰 공간이 우리를 반겼다. 맞다. 독립서점들은 몇몇 유명한 곳들을 빼곤 대개 작다. 맥주와 커피를 팔기 때문인지 테이블이 있어, 가방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북적이는 바깥의 거리와는 다르게 차분히 가라앉은 곳. 작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장르의 책들을 빼곡히 정리해 두었다. 벽과 천장과 조명, 그리고 책장 가구까지 모두 흰색으로 깔끔한 배경을 만들고, 알록달록한 책들이 그 위에 얹혔다. 작은 공간이라 두껍고 무거운 데다 중후한 분위기의 가구보다는 책들과 충돌하지 않도록 최대한 가벼운 가구를 선택한 점이 눈에 띈다.



책방에서 각자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느라 오랜 시간 머물 수 있는 친구들을 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아무 말 없이 많은 책들을 집어서 펼쳤다. 보통은 책을 다시 덮어 제자리에 놓아뒀지만, 좋은 책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개가 깊이 끄덕여지는 것들이 많았다. 놀라운 재치를 가진 책들도 왕왕 있었다. 다만 너무 많아 모두 살 수 없었던 것. 손에 들게 된 엽서와 책들이 많아졌다.



고스트 북스라는 서점의 이름은 보이지 않아도 존재감이 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지었다고 들었다. 우리도 들어가기 전에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오래 이곳에 머물렀다. 누구 하나 그러자는 말 없이도, 그렇게 됐다. 존재감 때문이었을까.




3


여행에 가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동 중에 시간을 때우려고 보는 영화 말고, 정말 정식으로 그 지역 영화관에 가거나 아껴둔 영화를 그 지역에 가서 보는 것. 영화는 그 자체의 감동을 너머 그 여행으로 기억된다.



여행지에서 산 책도 그렇다. 고스트 북스에서는 나 말고 다른 누군가의 행복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책을 만났다. 이 여행에 대해 기록해 주는 엽서와 가장 짧은 단편 소설집도 받았다. 이제 내가 만난 그 책과 엽서들은 이 여행으로 기억된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지만, 사진 외에 여행을 기억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분명 존재한다.





친구 빔과 친구 노숀과 함께 울산, 경주, 대구를 여행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공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지라, 힙하고 핫하고 헤리티지한 공간을 찾아 즐기고 싶었어요. 우리의 여행은 그래서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어졌습니다. 'sss의 hhh를 찾아서' 시리즈의 글들은 그렇기 때문에 건축을 읽는 글이 아니라 공간을 기억하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편히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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