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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Aug 24. 2018

그래서 내 진정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데?

SSS의 HHH를 찾아서_ 도깨비 명당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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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진 언어의 아주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정의를 내리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느끼는 수많은 감정 중 비슷한 공통분모를 찾아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유로, 어떤 생각이 들어서, 어떤 마음이 되는 것'을 하나하나 분류하고 정의하여 그렇게나 많은 단어들을 만들어 냈다. 기쁨, 슬픔, 분노, 낙담, 실망, 질투, 존경, 심려, 걱정, 불안, 신뢰, 그런 단어들. 덕분에 우리는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들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나눌 수 있게 됐다.


그중 믿음에 대하여 나는 이런 정의를 내려왔다. 믿음. 보이지 않아도 있다고 여기는 것. 이미 눈으로 보여서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인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으면, 그냥 없다고 여기면 조금 더 편안할 텐데. 사람들은 굳이 어떠한 이유를 내세워서라도 믿고 싶어 한다. 확인받고 싶어 하는 마음. 내가 이 길로 잘 가고 있구나. 이 사람이 나랑 꼭 맞는 사람이구나. 나는 지금껏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잘 될 것이구나. 믿고 싶은 그 마음에 기댄 것이 점, 사주, 운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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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엄마가 나한테 말한다.


선아야. 너는 그릇인데, 엄청 큰 대접도 아니고 간장을 담을 정도로 작은 종지도 아니래. 중간 사이즈의 그릇이라서, 아주 아주 많은 것을 담지는 못해도 어디에서나 무엇을 담든 요긴하게 쓰일 그릇이라더라.
너에겐 비행기 날개가 달렸대. 그래서 어디론가 훌쩍훌쩍 떠나곤 하나보다.
점쟁이가 이렇게 말하더라. 지금 일복이 터졌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라고.


내 얼굴도 본 적 없이 내 이름과 태어난 날짜와 시간만 두고 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데, 귀가 쫑긋 움직인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오히려 욕이나 한 바탕 해줄 텐데, 점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안 믿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듣고 싶어 지는 그런 이야기들.


정말 100%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사실 점이나 사주, 또는 운세에는 꽤 재밌는 구석이 있다. 특히 나에 대한 어떤 면에 대해서 그(또는 그것)가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렇다. 혹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세를 듣고 '내가 그래!'라고 생각할 확률이 심리학적으로 높다지만, 그래도 재밌는 것은 재밌는 것. 더군다나 좋은 말을 듣는다면, '에이, 난 그런 거 안 믿어.'하며 손사래 치더라도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2


누가 이런 깜찍한 아이디어를 냈을까. 대릉원 뒤편의 작은 골목, 도깨비 명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뽑기의 영역이 등장한다. 기와를 머리 위에 얹고, 붓글씨로 그럴듯하게 카테고리를 나눴다. 내가 본 뽑기 기계 중 가장 한국적이다. 이렇게나 열심히 만들었다니, 좀 귀엽다.



뽑기의 매력은 무작위에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리는 것. 나에게 맞는 칸의 뽑기 기계 앞에 선 후 레버를 돌리면 마치 포켓볼처럼 생긴 빨간 플라스틱 케이스가 굴러 나온다. 열기 힘들까 봐 도깨비 명당 양옆엔 고무망치 및 케이스 수거함도 마련되어 있다.



포춘 쿠키처럼 의미심장한 글귀나 몇 자 적혀있으려했는데, 운세가 A4 가득이다. 각자의 나이에 맞게 운세를 하나씩 뽑았다. 연애운도 하나씩 뽑아 도깨비 명당 앞에 마련된 작은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 각자의 운세를 공유했다. 이게 정말 딱 맞아떨어지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적어도 친구들끼리 깔깔거리며 웃을 정도의 즐거움은 충분히 제공한다.




3


여행 전에도, 여행 중에도, 여행 후에도 우리에겐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토론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진정한 사랑'의 정의와 유무. 나는 진정한 사랑은 없다고 했지만, 내 무신론자 친구 빔과 모태신앙 친구 노숀은 진정한 사랑이 이 세상 어딘가 존재한다고 믿고, 기다리고 있다. 연인운 뽑기 운세를 손에 들고 둘은 꽤나 진지하게 읽어 내려갔다. 빼곡한 글의 모음집에서 어떠한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면서.



도깨비 명당이라는 이름도, 초등학교 때나 돌려봤던 뽑기 기계도, 이곳이 천년 고도인 경주이기 때문에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서울이었으면 슬쩍 보고 지나쳤을지도 모르지만, 이곳이 경주니까 다들 기분 내며 레버를 돌려 본다. 그리고선 묻는 거다. 그래서 내 진정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데?




친구 빔과 친구 노숀과 함께 울산, 경주, 대구를 여행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공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지라, 힙하고 핫하고 헤리티지한 공간을 찾아 즐기고 싶었어요. 우리의 여행은 그래서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어졌습니다. 'sss의 hhh를 찾아서' 시리즈의 글들은 그렇기 때문에 건축을 읽는 글이 아니라 공간을 기억하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편히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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