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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Apr 05. 2019

성벽을 넘어 일단 들어오면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0 장강명의 르포


책을 읽다 몇 날 밤을 잠들었다. 책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내가 잠에 굴복할 때까지 책을 무리하게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주변 사람들에게 <당선, 합격, 계급>을 추천했더니 그것이 에세이냐고 묻는다. 아니. 그럼 소설이냐고 묻는다. 아니. 그럼 무엇이냐 묻는다. 이건 르포야. 르포가 무엇이냐 묻는다. 어렵다.


르포의 정의가 뭔지 설명하긴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기자 출신인 장강명이 그 장기를 가장 잘 드러낸 책이라 하겠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작은 의심으로부터 시작해 본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반례를 찾아 들이밀고, 결국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한다.


장강명은 문학계에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말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첫 책이었던 <표본> 이후 문학 공모전들을 조금 과장해서 휩쓸다시피 했고, 자타공인 문학상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젊은 작가일 테다. 그런 사람이 문학상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책을 썼다니, 누군가는 가식적이라 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읽어보면 안다. 그래서 더 잘 쓸 수 있었다.




1 입시, 벗어날 수 없는 간판


얼마 전 대한민국 사회를 가장 들끓게 한 드라마를 하나 꼽자면 그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스카이캐슬> 임이 자명하다. 


<스카이캐슬>을 보면서 모두가 함께 물었다. 대학이란 무엇일까. 좋은 대학을 나오면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가. 서울대, 그것도 의대까지 나오면 자연스레 그것은 인생의 성공으로 이어지는가. 일단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고, 그 이후엔 네가 좋아하는 일들을 실컷 하라는 부모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들의 모습은 그러지 않았는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됐다.


시험 자체가 부당한 계급사회를 만드는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번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다시는 지망생들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는 경직성이 근본 원인이다.

'1 장편소설 공모전이라는 시스템' 중에서


대학을 나와보니, 그것이 얼마나 벗어나기 힘든 간판이 되었는지 몸소 체감한다. 이름 이전에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부터 기억하고, 그것이 선후배라도 된다면 얼씨구나 좋다며 이끌고 따른다. 학벌주의의 장단점을 따지기 전에 묻고 싶다.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평생 그 대학의 그늘 아래를 벗어날 수 있을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평생 못 벗을 것 같다. 일단 한 번의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아무런 노력 없이도 그 간판은 유지된다.




2 공채, 높고 굳건한 성벽 안으로


그렇다면 공채라고 다른가?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입시를 겪은 사람들은 모두 입시의 공정함과 판단력에 대해 의문을 품지만, 공채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다. 정말 공채는 기업에게 필요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올바른 장치인가? 대기업에 취업하면, 그 사람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인가? 학벌을 가르고, 그에 더해 자체적인 시험 점수를 통해 선별하는 그들은 업무에서 정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가? 전공에 상관없는 시험을 치러 합격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높고 굳건한 성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들어가기 어렵지만 동문으로든 서문으로든 한 번만 안으로 들어가면 귀족이 되고, 거기서 안주한 채 바깥사람들을 깔보게 되는 성이 한국 사회에 너무나 많다.



어쩌면 사람의 잠재력을 평가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환상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어떤 시대가,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르는데, 그때 필요한 능력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미래 불확실성은 점점 커지는데, 출제 위원이나 심사위원의 사고는 어떤 상상력의 한계선을 넘지 못한다. 애초에 어떤 조직도 전복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에게 문제 출제나 심사를 맡기지 않는다.



간판의 본질적인 힘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야 간판의 중요성이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낮아진다. 간파의 힘은 정보 부족에서 나온다.

'9.5 당선과 합격' 중에서


대기업에 지원하여, 대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에 따라 공채를 준비하는 많은 사람들을 부정할 순 없다. 그들이 대기업에 지원하는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고,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 다만 입시와 마찬가지로 간판을 염두에 두고 대기업에 지원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나중에 퇴사를 하더라도, 삼성 출신인 것은 도움이 된다.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


정부의 많은 정책들이 좋은 중소기업도 많다며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지만 다만 묻고 싶다. 중소기업이 정말 다니기 좋은 회사임을 어떻게 보장하는가? 취업 준비생이 단순히 어떤 정책들을 믿고 중소기업에 지원하기엔,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다. 이는 <당선, 계급, 합격> 8.5 지뢰밭 앞에 선 병사 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3 건축사 시험, 아직 손으로 그리는


내가 가진 직업이 나에게 요구하는 역량은 각종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 종류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제 앞으로 봐야 할 시험이라고는 건축사 시험 정도겠다. 보통 사람들에게 익숙한 의사, 변호사 시험과 건축사 시험*은 어떻게 다른가.


*건축사 시험은 말 그대로 건축사를 따기 위한 시험으로, 건축사가 된다면 신축이나 대수선 등의 인허가를 진행할 수 있다. 건축사가 아니어도 건축가이긴 하겠지만, 건축사가 있어야만 건축사사무소를 차릴 수 있다. 인허가를 제하더라도, 개소하고 싶다면 피할 수 없는 관문이다.


오늘 뉴스에서는 5G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했고, 최근 접히는 디스플레이의 휴대폰이 발매되었고, 이제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면 연필 대신 애플 펜슬을 드는 시대다. 그렇다면 건축사 시험의 풍경은 어떠할까? 아직까지 건축사 시험은 제도판 위에 손으로 도면을 그린다. 놀랍게도 현재 실무에서 실제로 손도면을 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컴퓨터가 아직 없던 시절에 만들어진 시험 방식을 2019년도까지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연차의 건축가들은 그 시험을 응시하기 위해서 주말을 모두 바쳐가며 하루 8시간씩 책상에 앉아 선을 똑바로 그리는 연습을 하고, 글자를 예쁘게 쓰는 훈련을 한다. 이 얼마나 큰 낭비인가.


건축사 시험을 치르는 방식에 대한 논의는 미뤄두고, 건축사에 한 번 합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다른 직업군의 '사'자들이 모두 그러하듯, 한 번 건축사를 따게 되면 그 자격이 박탈되지 않는다. 성벽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젊은 건축가들이 독립을 위해 재수학원에서처럼 좁은 책상 사이로 몸을 구겨 넣고 시간을 소비할 때, 아주 옛날 옛적에 건축사를 딴 할아버지들은 건축사 이름을 빌려주며 돈을 챙긴다. 



건축사를 빌려 건축 설계를 지속하는 사무소들은 물론 불법이나, 공공연하다. 젊은 건축가들은 당장이라도 자격증이 필요하고, 건축사협회는 절대평가 방식이 아닌 상대평가 방식으로 시험 합격률을 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 아니라 그 해에 어떤 사람들이 시험을 쳤는지, 어떤 심사위원에게 걸렸는지가 합격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사협회에선 건축사가 이미 많으니 건축사 시험의 합격률을 낮추겠다는 공략이 매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젊은 건축가 입장에선 나이 많은 건축사들의 은퇴 혹은 죽음을 기다릴밖에.




4 문제의 인식


대한민국 사회에서 만나는 문제들이 있다. 특정 분야의 특정 이슈로 정리될 순 없다. 이곳저곳에서 두더지 게임에서처럼 출몰한다. 두더지를 열심히 내리쳐도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두더지가 또 고개를 내민다. 이 두더지를 퇴치하기 어려운 이유는 문제가 무엇인지 확실히 정의 내리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분명 문제임은 분명하고, 고통받는 사람은 많은데 잘못의 실체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언뜻 보면 공정하고, 우리는 쉽게 그것이 정의이고 올바른 규칙이라 믿는다. 사회적인 약속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겠다.


<당선, 합격, 계급>은 리서치를 바탕으로 한 의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문제를 인식하는 과정이 한참 수반된다. 읽다 보면 누군가는 답답한 마음에 묻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에 대해 장강명은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극단적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일단 성벽에 뚫린 조그마한 문을 통과하고 나면 다시 성벽 밖으로 밀려날 리 없는 경직성을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판의 문제는 허물어지지 않는 간판의 내구성과 간판 너머 정보의 부재 탓이라 그렇게 주장한다. 



한순간에 이 성벽이 무너지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는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임을 잊지 않고 입 밖으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또한 간판에 기대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한다. 나를 대변해 주는 것은 나의 학교도 아니고, 나의 직업도 아닐 테다. 분명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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