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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Apr 08. 2019

나쁜 기억을 잊게 해주는 망각의 숲

망우삼림, 을지로


0 찰나의 기록


며칠 전 후배 동해는 단톡방에 공유하고 싶다며 트레블코드의 뉴스레터 중 어떤 구절을 인용했다. 그 단톡방에는 어떤 형태로든 건축을 하며 사진을 취미로 가진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Architects create three-dimensional buildings out of two-dimensional drawings; whereas photographers reverse the process by capturing objects as two-dimensional pictures." (건축가들은 2차원의 설계도에서 3차원의 빌딩을 만드는 반면, 사진가들은 그 대상을 2차원의 사진으로 찍음으로써 그 과정을 되돌려 놓습니다.)


건축 설계를 하고, 지어진 공간을 사진 찍어 기록으로 남기는 나의 작업들은 2차원과 3차원을 몇 번이고 넘나드는 셈. 이 구절이 그 단톡방 속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두근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동해의 말에 우리가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어떤 시점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우리는 그때, 충무로에 있었다.




1 여기, 을지로


아직까지 모르겠다. 왜 충무로였을까? 충무로엔 유독 현상소가 많았고, 액자집들도 많았다. 영화의 거리이기도 했지만 사진의 동네이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서 현상 용액과 함께 필름을 사러 한 달에도 몇 번씩 충무로 역에 내렸고, 카메라가 망가지기라도 하는 날엔 수리를 하러 몇 번이고 그 근방을 헤매었다.


그중 필름 현상 용액의 향이 알싸하게 남아 있던 현상소들은 대개 낡고 어두운 조명에 정신없게 쌓인 필름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콘크리트 위에 흰색 페인트만 간단하게 칠한 채, 현상소의 사장님들은 하얀 불빛의 스탠드 아래에서 카메라를 수리하고 있거나 열심히 돌아가는 스캐너 옆에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때면 사장님들의 얼굴에는 모니터의 푸른 불빛이 비추었다.


사장님들은 막 대학교에 들어간 어린애들이 찾아올 때면 귀찮아하는 티가 역력했고,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질문에 대강 대답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몇 번이고 찾아가 얼굴을 비추면 그제야 그들의 고객이 되어 음료라도 꺼내 주며 앉아 기다리라 안내해 주었다.


조금이라도 더 싸고 친절한 곳을 찾으려 해도, 여전히 충무로 어느 낡은 건물의 2, 3층으로 오를 때면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보통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5년에서 10년 정도로 오래된 포스트들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전화를 해 영업 유무를 확인해야 했다.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는 젊은 사람들의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일 테다. 



그런데 무슨 일이었을까. 유행은 도대체 어떤 규칙에 따라 다시 돌아오곤 하는 것일까. 필름 카메라의 유행이 다시 이 땅에 도래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카메라 중고 가격이 두 배 가까이 치솟기도 했다. 영문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필름 감성에 매료되었고, 휴대폰 앱에서 필름 필터를 입히는 것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다니던 필름 현상소에는 점점 더 사람이 많아졌다. 이제 필름을 맡기면 일주일을 넘게 기다려야 겨우 파일을 받아볼 수 있었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는 분들을 위한 설명. 필름 카메라를 이용해 필름을 찍으면, 필름 안에 사진이 저장된다. 이는 화학 약품을 이용해 '현상' 단계를 거쳐야 하고, 요새 대부분의 현상소에서는 현상 후의 필름을 다시금 '스캔'하여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 준다. jpg로 받아 볼 수 있는 것.



그러니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을지로에 새로운 현상소가 생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충무로 근처, 을지로 3가에 새로운 현상소가 생겼다고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소문은 인스타그램을 타고 퍼지고 있었다.




2 찍고, 찍히는 그 사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최소 몇 초일까. 30초 정도면 충분할까? 어떤 말을 쓸지, 어떤 태그를 달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30초보다 적은 시간이 걸릴 테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기계가 휴대폰이 아니라 필름 카메라라면 그 이야기가 달라진다. 필름을 사고, 끼우고, 찍고, 감고, 현상소에 직접 발품을 팔아 방문하여 맡기고, 돈을 내고, 기다리고, 받아봐야 한다. 그제야 한참 전에 찍었던 나의 순간들을 다시 만난다. 그게 필름의 불편한 점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이런 필름의 불편함을 본떠 만든 앱도 크게 유행하지 않았던가! 


필름 사진의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현상소는 필름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내가 아무리 부지런하고 공을 들여도, 현상소가 늦고 퀄리티가 좋지 않다고 한다면 나의 사진 결과물 또한 그렇게 늦고 별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때로 친구들에게 묻는다. 요새 다니는 현상소 어디야?



새로운 현상소가 생겼다기에, 심지어 가격도 나쁘지 않고 현상이 빠르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것이 어디냐 물었다. 망우삼림. 망우삼림이 이름이야? 지금껏 내가 알던 현상소의 이름하고는 많이 다른데? 밴드의 이름 같기도 하고, 어느 재즈 바의 이름 같기도 한 이름의 현상소를 기대 없이 찾았다. 이곳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딱 을지로여서 가능한 공간인 동시에, 홍콩 같기도 했다. 짙은 원색의 패턴들과 붉은 간판 때문에 그렇게 느꼈던 걸까?



망우삼림을 단순한 현상소라 정의 내리긴 어렵다. 망우삼림은 현상소이기도 하지만, 포토스튜디오이기도 하고 카페도 함께 겸한다. 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공간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데, 구획되지 않은 사무실 속에서 한 켠에는 조명과 흰 배경 천이 드리워 있고, 창을 뒤로한 중앙에는 필름 현상 기계와 함께 작게 음료를 준비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스튜디오와 필름 현상. 여기까지 이상하지 않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전개처럼 보인다. 놀라운 건 공간의 한편에 테이블과 의자를 두고, 카페를 차렸다는 점이다.



망우삼림은 몇 개 안 되는 이 테이블에 앉아 사람들이 무얼 하길 바란 걸까? 현상을 기다리는 공간이라고 할 순 없다. 현상은 잠깐 자리에 앉아 기다려서 받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니니까.


정성 들여 한편에 마련해 둔 테이블을 두고 그냥 나갈 수 없어 잠시 한 테이블을 골라 앉아 노트를 펼쳤다. 정리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며, 현상소를 찾는 여러 사람들이 들고 나는 모습을 바라봤다. 젊은 사람들이 많았고, 생긴 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현상소다 보니 처음 찾는 사람들이 자주 보였다.


망우삼림 곳곳을 구경하다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시시콜콜한 대화였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현상소 사장님들과 이다지 중요치 않은 일상의 대화들을 나눈 적이 있었던가? 내가 나눈 대화라곤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안녕하세요. 2 롤이에요. 언제 받을 수 있죠? 얼마 더 드리면 돼요? 안녕히 계세요. 아, 망우삼림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까? 아직도 이 시대에 필름 사진을 고수하는 사람들과.




3 중첩되는 이미지들


망우삼림의 공간은 수많은 의미의 중첩으로 점철되어 있다. 을지로라는 위치에 붉고 푸른 원색의 패턴과 붉은 네온사인을 얹어 홍콩 어딘가를 상상케 한다. 몇십 년은 되었을 공간 중 어딘가는 그대로 두고, 또 어떤 것은 현재의 유행을 그대로 따랐다. 낡고 오래된 공간과 가구 위에 만들어진 공간에서 카카오톡으로 사진을 보내주는 경험은 이제껏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새로운 현상소를 열다니, 무모했다.


분명 존재했을 리스크를 딛고 망우삼림을 이리도 빠른 시간 내에 알린 데에 주요한 공헌을 한 것은 역시 이미지의 중첩. 을지로의 많은 공간들이 시도했던 전략임에도 불구하고, 통해버렸다. 



망우삼림의 배경이라고 하면, 역시 이 커튼이다. 꽃무늬 벽지라고 하면 질색했던 내가 이제 와 꽃무늬 커튼을 고른 망우삼림의 선택에 박수를 칠 줄이야? 인생은 모를 일이다. 초록 바탕의 붉은 꽃이 수놓아진 반투명한 이 커튼은 그 자체로 이미 망우삼림의 강력한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외부에서 망우삼림을 찾아올 때에도, 내부에서 커튼 너머로 을지로의 도심 풍경을 바라볼 때에도 언제나 그곳에 있다.



망우삼림은 사거리 모퉁이에 위치해 있어 3개의 방향으로 모두 큰 창이 나 있는데, 창을 따라 커튼이 길게 따라 이어졌다. 커튼에 둘러싸인 셈이다. 커튼과 창문 사이로 망우삼림의 유일한 간판인 붉은 네온사인이 내부에서도 커튼 뒤에서 비친다.



망우삼림을 그저 현대의 공간처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을지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곳곳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옛 물건들이 듬성듬성 아무렇지 않게 놓여있다. 첫 번째는 작업 공간 위에 달린 어마어마한 녹색의 형광등. 아마 조금이라도 이곳이 어두침침했다면 조금 무서웠을 법도 하다.


그리고 작업공간에 무심하게 놓인 컴퓨터의 모니터. 윈도우97 때에 저런 모니터를 다들 쓰지 않았나? 필름과 함께 어우러지니 그게 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망우삼림은 음식점으로 말하자면 오픈 키친의 형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벽 구획도 없고 칸막이조차 없이 작업공간을 훤히 내비치고 있는데, 이런 곳에 유일하게 붙박이 형태로 설치된 가구는 딱 두 종류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 작업공간의 책상. 그리고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필름보관장이다. 길게 나누어진 수납공간 안으로 현상된 필름을 녹색 봉투에 넣어 보관하고, 그 측면으로는 작게 인화된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다. 말하자면 수장고이기도 하지만, 전시장이기도 한 셈. 합판으로 짜인 이 기다란 필름 장에는 망우삼림이 오픈한 지 얼마 안돼서 꽤 빠른 속도로 필름이 모두 꽂혔는데, 추후엔 좀 더 확장해야 할 것도 같다.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카페 쪽 공간에는 이곳이 현상소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필름 카메라 장이 있고, 천장에 매달린 오래된 펜던트 등에는 슬라이드 필름 같은 것들이 매달려 있기도 하다.



망우삼림의 커튼을 바탕으로 해 골라진 가구들도 모두 딱 망우삼림답다. 공간을 돌아다니며, 여러 장소들의 특징들을 꼽아보곤 하지만, 망우삼림은 그중에서도 패브릭을 잘 쓴 보기 드문 공간이다. 아니, 사실 패브릭을 제외하면 큰 건축적인 행위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망우삼림은 딱 망우삼림이 됐다. 그렇다면 망우삼림을 통해 다시 묻게 된다. 도대체 건축을 이루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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