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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Mar 15. 2020

욕망, 광기, 밀집과 압축의 도시 II

밤의 뉴욕


우리가 처음 가 본 바는 청담동에 있었다. '르 챔버'라고 하는 곳이었는데,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블로그를 통해 알고 있긴 했지만, 글로 읽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과는 분명 달랐다.


지하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니, 우리를 반긴 것은 푹신한 안락의자와 책장. 어디에도 출입구는 없었다. 아니, 없어 보였다. 책장에서 어떤 책을 빼면 문이 열린다고 하지 않았나? 서로 큰 물음표를 머리 위에 띄운 채 아무 책이나 꺼내보기 시작했다. 이 책도 아니고, 저 책도 아니야. 어디 르챔버라고 적힌 책 없어? 그렇게 입구 책장에 있는 모든 책들을 꺼내던 찰나 자동문과 일체화되어있는 책장이 옆으로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오셨어요?"


자동문 뒤로 미소를 띤 바텐더 한 분이 우리를 구출해주러 나오셨다. 오,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이걸 다 빼려던 것이 아닌데,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몰라서 그랬어요. 당황한 나의 횡설수설한 사과와 변명에 그분은 친절히 도 르 챔버의 열쇠를 알려주셨다. 책장 안에 있는 한 권의 책이었다.


"왠지 분해. 우린 건축하는데, 입구를 찾지 못했어."


입구를 스스로 찾아내지 못해, 왠지 모를 분함을 느끼며 르 챔버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렇게 입구를 꽁꽁 숨겨놓은 바들을 스피크이지 바(Speak Easy Bar)라고 부르며, 그 시작은 바로 뉴욕에서였다는 것.


스피크이지 바가 생긴 것은 모두 1920-30년 대 금주법이 제정되고 실행되던 때였다. 술을 개인적 이유로 마시거나, 소유하는 것이 모두 금지되자 몰래 숨어서 마시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다. 그래서 스피크이지 바는 모두 찾기 어려운 입구를 가진다. 몰래 불법을 저지르는 장소이니, 간판을 달고 조명을 환히 켜놓을 수 없었던 것. 그래서 아주 재밌는 공간들이 탄생했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제약은 창의성에 불을 붙인다.




뉴욕 여행을 떠나기 전, 뉴욕에 대한 서적과 포스팅 사이를 지나다니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낮에 즐길 수 있는 뉴욕에 대한 콘텐츠는 차고 넘치는데 밤의 뉴욕에 대한 이야기는 찾기 힘들다. 뉴욕은 잠들지 않는 대표적인 도시인데도 그렇다. 뉴욕은 재즈와 버번위스키와 스피크이지 바의 도시인데도 그랬다.


"우리 뉴욕 가면 바 진짜 많이 다니자. 스피크이지 바 다 찾아다니자. 재즈바도 왕창 가자. 밤의 뉴욕을 즐기는 거야."



빔과 나는 그 부분에서 아주 쉬운 합의를 이루었다. 숨겨진 공간들은 우리 둘의 흥미를 돋웠고, 공간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했다. 우리 둘은 모두 칵테일과 위스키를 좋아했고 재즈를 즐겨 들었다. 뭐가 문제였겠는가? 뉴욕의 지하철은 24시간 운행이었다.




Angel's Share



기린 맥주의 로고가 붙어있는 2층의 이자카야로 올라서면 일식집으로 들어선다. 오코노미야끼와 야끼소바와 같은 음식들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공간을 가득 채운 음식 냄새에 현혹되지 말고, 계단을 올라 바로 옆에 위치한 나무 문을 당겨야 한다. 물론 나무 문에도 어떠한 표시도 없다.

나무 문을 당기고 들어서면 그제야 Angel's Share에 도착한 것이다. 촛불이 테이블 위에 하나씩 빛나 공간을 겨우 조금 밝힌다. 아주 어두운 가운데 바텐더들의 등 뒤로 술병들이 마치 조명처럼 서있다. 바텐더들의 머리 위로 바의 이름처럼 천사들의 그림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Manhattan Cricket Club



BURKE & WILLS라는 이름의 비스트로 앞에서 한참을 헤맸다. 또 다른 입구를 찾기 위해서였다. 구글 지도 상으로 분명 이곳의 주소가 맞았다. 결국 비스트로의 문을 열고 종업원에게 물었다. 우리는 맨해튼 크리켓 클럽을 찾아왔다고. 그제야 종업원은 웃으며 우리를 2층으로 안내했다.

언뜻 허름하고 낡아 보이던 비스트로의 인테리어와 달리, 2층으로 올라와 문을 열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샹들리에 조명과 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문양의 벽지가 벽을 수놓는다. 푹신하고 낮은 소파에서 사람들은 1층의 가게와 조금은 다른 복장과 자세를 취하며 시간을 보낸다.




Attaboy



이곳은 양복점이다. 창문에 분명 TAILORS라고 똑똑히 적혀있다. 힌트는 굳게 닫힌 철문 위의 AB. Attaboy의 이니셜이다.

우리가 철문 앞에서 문을 두드려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자, 철컥 철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잠겼던 문을 열고 종업원이 몇 명이냐 묻는다. 들어와서 기다리라는 말은커녕 일절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기다려야 한다는 말만 남기고 다시 철문을 굳게 닫고 문을 잠근다.

애타 보이에서는 CCTV를 통해 문밖에 선 손님들을 확인하고 열쇠로 잠긴 문을 열고 닫는다. 밖에서 기다리는데 문 잠그고 들어가면 얄밉고 재수 없는데 나 들여보내 줄 땐 또 그게 뿌듯하고 그렇다.




The Back Room



LOWER EAST SIDE TOY.CO 였을까. 장난감 가게의 간판이 붙어 있는 철제 난간을 열고 지하로 내려온다. 낙서가 가득한 벽으로 이루어진 좁은 복도를 지나 플래시로 얼굴을 비추는 문지기를 만난다. 문지기는 우리에게 신분증을 요구하고, 여권을 보자 고갯짓으로 또 다른 문을 가리킨다.

이곳은 The Back Room. 실제로 금주법 시대에 운영되었던 스피크이지 바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그 당시처럼 칵테일은 술잔이 아닌 티 컵에 담아주며, 당연하게 현금을 요구한다. 가게의 한편에는 ATM까지 갖추고 있다.

그 시대를 연상케 하는 그림들과 함께 붉은 벽면과 소파, 나무로 이루어진 가구들이 눈길을 끈다. 이 모든 것이 모여서 이곳이 1930년대부터 존재하던 스피크이지 바의 자리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The Office NYC



음식점 안에 바가 있는 경우는 봤어도, 간판을 바가 아닌 다른 곳으로 적어놓는 곳은 또 봤어도, 바 안의 바는 처음이다. The Office NYC는 예약을 하고 방문했다. 바깥 리셉션의 종업원에게 조심스레 '디 오피스를 예약했다'라고 속삭이면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내해 준다.

바 안쪽 부엌 옆 쪽문으로 들어서면 또다시 바가 등장한다. 바깥의 바는 조금 더 시원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라면, 안쪽의 The Office NYC는 조금 더 조용하고 정돈된 서재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PDT



CRIF DOGS라는 글자를 향해 몇 계단을 내려온다. 반지하에 위치한 핫도그 가게다. 오래된 오락기가 있고, 낡은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 위로 사람들은 케첩과 머스터드소스, 맥주와 함께 핫도그를 먹고 있다. 

각종 스티커가 잔뜩 붙여져 있는 벽을 따라 유심히 살펴보면, 핫도그 가게 내에는 전화부스가 하나 있다. 벽에 매입된 공중전화 박스다. 한 사람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그곳 안에 문을 접어 열고 들어가,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면 곧 공중전화 박스의 또 다른 면이 열리며 바가 등장한다. 이곳 PDT는 핫도그 가게와 연결된 바여서 그런지 다른 바들보다 꽤 캐주얼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전 세계에 펼쳐져 있는 스피크이지 바들이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포츠에도 지켜야 할 룰이 있듯, 공간에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규칙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백화점이나 몰이 아닌 이상에야 문 하나에 상점 하나라는 것. 문은 문처럼 생겼다는 것. 방문객들을 위한 초인종이 존재하고, 인지성을 높이기 위해 간판을 설치한다는 것.


공간의 관습적인 규칙들을 깨버린 스피크이지 바는 입장부터 하나의 놀이다. 가게에 들어가는 것뿐인데도 어려운 퍼즐을 풀거나 보물을 찾았을 때 얻어지는 가벼운 쾌감과 같은 것을 경험하게 한다. 이곳은 뉴욕이니 결국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바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는 비밀리에 개최되는 파티에 초대된 것과 같은 상상도 한 번 해보는 것이다.



뉴욕은 앞서 말했듯 스피크이지 바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방문한 곳 이외에도 기발한 방식으로 숨겨져 있는 바들이 존재한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재즈 공연도 이미 봤고, 뮤지컬도 본 후라면 어떤 밤에는 스피크이지 바의 문을 두들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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