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이 기분을 무엇이라 정의 내려야 할까. 작가들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다.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다. 문장 사이로 새어 나오는 따스한 시선에, 잘 짜인 이야기 구조의 치밀함에, 혹은 일상에서 낚아 올리는 그들만의 유머에.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이 상투적이라면 더 날것의 언어로 대체할 수 있다. 입덕.
요즈음 읽는 젊은 작가들의 이야기는 허구의 소설임에도 현실과 동떨어져있지 않다. 오히려 그 무엇보다 현실의 곁에서, 등잔의 아래에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그래서 때로 생각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 앞으로 바뀌어 갈 세계와 가장 먼저 조우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이제 10년 안에, 아니 5년 안에 마주하게 될 미래는 현실에 발을 디딛고 있는 이 책 한 권 안에 있다.
고마운 글들이다. 2020년 4월 15일 오늘, 총선이 치러지는 가운데 뉴스는 우리를 자꾸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 하는데 소설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현실에 발 붙이게 한다. 똑바로 볼 용기와 의지를 갖게 한다.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모든 것을 알고, 알 수밖에 없고, 알아채는 것이 익숙한데 또 누군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론가들은 이 소설에 대하여 '스릴러'라는 표현을 썼다.
앎이 권력이라고 나는 언제부터 확신하고 있었을까. 무지가 가장 큰 권력이고 또 지위임을 강화길 작가는 말 그대로 꺼내어 펼쳐내 보여준다.
책의 뒤편 소설가들의 심사평에 남자 소설가 전성태는 소설의 곳곳에서 날카롭게 튀어나오는 여성들의 당혹감과 분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다시 읽어야 했다고 말했다. 어느 순간 화자가 아니라 남편의 입장에서 읽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이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또 많은 수가 그럴 것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토론이다. 우리는 제대로 토론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토론의 주제는 반 이상은 낙태 찬반 토론이었던 것 같다. 낙태라는 단어를 화면 크게 띄워 놓고서, 반 친구들과 조를 나눠 찬반 토론을 진행했다. 큰 진전은 없었다. 낙태 반대쪽의 '생명의 소중함' 필살 무기로 토론은 쉽게 어디까지가 생명인지로 옮겨갔다. 아무도 그 자리에서 아이를 가진 여성의 삶에 주목하지 않았다. 낙태를 찬성하는 쪽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어린 미혼모의 경우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는 극단적 가정의 처절함 뿐이었다. 그것은 선택이라 부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고, 그러한 시간들은 낙태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높인 채 끝이 나곤 했다.
누군가는 나에게 김초엽 작가는 마치 세계를 한 번 만들어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고, 깊이 공감한다. 저 너머의 세상을 이리도 쉽게 내어 보여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니. 또 그것이 이제 막 시작이라니. 독자로서 감사한 일이다.
젊은 작가상 단골이라는 최은영 작가는 내게 있어 꽉 쥐면 혹여 깨어질까 고이 품어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은 글과 마음이다. 하지만 아마 그 누구보다 단단하고 강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동시에 짐작한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작가라니. 띄어쓰기 마저 소중하다.
평론가는 장류진을 타고난 소설가라고 말했다. 장류진 작가가 보여주는 우리의 일상들이 서로 연결되고 소통하는 광경을 본다. 더 이상 소설이 아닌 것만 같다. 지금을 바라보는 장류진 작가의 시선을 좋아한다. 언제나 응원하고 싶은 굳은 마음이 활자 어딘가에 박혀 있다.
은연중에 여성들이 겪는, 겪고도 웃으며 넘기고 마는 무례함을 장류진 작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직시하지만 순수하게 분노하고 원망할 수는 없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자각을 하게 하니까. 또 우리는 그들에게 기대곤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