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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Oct 12. 2020

따뜻한 온기와 생명을 담는다는 마음으로

온양민속박물관


어떤 영화를 볼 때 주연 배우와 감독, 줄거리까지 알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추천 한 마디로 검색 한 번 안 해보고 영화관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다. 어딘가를 가보고자 할 때, 나는 후자에 더 가깝다. 누가 좋다고 하면, 일단 가보는 편. 온양민속박물관이 그러했다.




1 궁 같다는 것


온양민속박물관의 첫인상은 내 예상과는 달랐는데, 나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묵직하고 위엄을 갖춘 모습일 것이라 기대하고 도착했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정작 온양민속박물관의 입구에 선 나는 내가 박물관에 온 것인지, 궁에 온 것인지 살짝 혼란스러워졌다. 온양민속박물관은 옛 궁과 같은 느낌을 풍겼다.


돌담이 둘러싸고 있는 온양민속박물관은 정문 앞에 위치한 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해야 들어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열려 있는 박물관의 외부 공간과는 다르게, 주차를 하자마자 담장 앞에서 1차적으로 표를 구매하게 한다. 마치 경복궁이나 창경궁에 입장할 때처럼. 궁처럼 건물 자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공간까지 함께 보아야 그 가치가 있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만큼 외부공간 조성에 정성을 쏟고 있기 때문일 테다.



사실 나는 건물을 보러 온 것인데, 정원과 날씨와 계절이 너무 훌륭해서 마치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온양민속박물관 안에는 건물이 몇 채 따로 흩어져 있는데 이들을 모두 돌아보기 위해선 곱게 가꾸어지고 있는 정원을 따라 걸어야만 한다. 걷는 도중에는 아주 오래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나무도 만나고, 작은 고인돌들도 만나고, 조각들도 지나쳐야 한다. 약도를 보고 한 바퀴를 돌아도 좋고, 무작정 일단 걸어봐도 좋다. 길을 잃어도 어렵지 않고, 힘들지 않은 크기의 정원이다.



전시를 관람하며 건물과 건물을 오가며 잠시 중간에서 커피를 마셔도 좋고, 잠깐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어도 좋겠다. 운이 좋다면 카페 앞쪽으로 마련된 야외 공연장에서 공연을 봐도 좋을 것이다. 민속박물관에 관심이 없더라도, 전시에 크게 흥미가 가지 않더라도 날씨가 좋은 날이라면 온양민속박물관에 방문할 이유가 정원만으로 충분하다. 도시에서 동떨어져 기분 좋은 산책이 가능하니까.




2 근대건축스러움


2020년 여름, 90년대 음악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유튜브에서는 탑골 가요 리스트가 유행하고, <놀면 뭐하니?>에서는 90년대 음악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노래로 몇 주간 음원차트 1위를 차지했다. 마치 90년대에 있었던 것만 같은 음악을 만드는 아티스트들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그에 열광했다. 사람들이 함께 그리워하는 어떤 시대가 있는 것이다.



90년대 음악이 그러했다면, 건축에서는 아무래도 근대 건축이 그런 시대가 아니었을까.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또다시 두꺼운 벽돌로 몇 겹이나 감싸 땅에 내려앉은 무거운 건물들. 3D 프로그램이 없었던 시대에 오로지 모형과 도면만으로 만들어 낸 독특한 공간 구조. 김수근 건축가로 대표되는 근대의 1세대 건축가들이 남긴 건축물들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찾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온양민속박물관의 본관도 딱 한 걸음 내딛자마자 느꼈다. 오, 근대건축스러운데.



로비를 감싸고 있는 붉은 벽돌과 함께 삐쭉 솟은 하얀색 천장이 먼저 보인다. 이런 천장을 볼 때마다 샘이 난다. 이런 천장이 하고 싶다. 조명도, 스프링클러도, 환기 장치도 달리지 않은 매끈한 천장. 대각선으로 두 면이 만나 우뚝 솟은 부분에는 코너로 창이 뚫리고, 낮은 부분에도 가로로 긴 창이 뚫려 있어 작은 스포트라이트밖에 없는 공간인데 로비가 어둡지 않다. 빛은 충분했다.



두 개의 층이 수직으로 연결된 로비에서는 전시 동선이 만나며 카페와 뮤지엄 샵이 자리하고 있다. 계단을 바로 올라 2층부터 전시를 돌거나, 건물로 입장하자마자 왼쪽의 1 전시실부터 돌아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면 된다. 어차피 전시실들은 이어져 있기 때문에 3개의 전시실을 모두 돌고 나면 다시 로비로 돌아오게 되는 구조다.


이 건물을 설계한 김석철 건축가의 글을 읽고 알게 되었는데, 박물관 치고는 독특하게도 전시실들을 모두 이어놓은 이 구조는 설계보다 이전에 전시기획에 먼저 건축가가 참여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본관에서 이뤄지는 전시는 상설전시로, 옛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물건들이 의식주에 따라 분류되어 전시되어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보기 좋다.



특히 입구 바로 위쪽, 2층에 뚫려있는 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의 모습이 아름답다. 오래 보고 싶은 모습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던 중, 온양민속박물관 본관의 설계는 김석철 건축가로, 김수근과 김중업 씨의 제자였으며 예술의 전당을 설계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온양민속박물관 설계에 대한 소회는 아래 기사에 담겨있다.


http://www.jutek.kr/user/selectBbsColumn.do?BBS_NUM=1114&COD03_CODE=c0317&MEN02_NUM=44&INS_NUM=37




3 따뜻한 온기와 생명을 담는다는 마음으로


사실 온양민속박물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한 가지를 알고, 목표하고 갔다. 이타미 준이 한국에서 했던 첫 설계, 온양민속박물관 안에 위치한 구정아트센터를 보기 위해서다.


아직 사람들에게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은 낯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타미 준이 제주도에 설계한 건물들은 제주 여행을 가기 위해 계획을 짜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미지를 본 적이 있으리라 단언할 수 있다. 이타미 준이 설계한 방주교회, 비오토피아 박물관, 포도호텔은 제주에서 손꼽히는 건축물들이다.



구정아트센터는 온양민속박물관의 한쪽, 카페와 맞닿아 있는 곳에 나지막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쩌렁쩌렁 소리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땅 속으로 기어들어가지도 않은 채 주변의 나무들과 함께 고요하고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충무공의 땅을 기리기 위해 거북선 모양을 본뜬 지붕을 올리고, 햇빛의 색을 닮은 외장을 두르고, 아산 일대의 석재를 사용했다. 궁 이외의 건물에 기와가 사용될 때 느껴지는 어색함을 싫어하곤 했는데, 구정아트센터는 콘크리트 천장 위에 기와가 올라앉아 있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거북선 모양으로 뻗은 지붕에 눈길을 빼앗겨서였을까.



내부에서 박공 모양으로 처리된 전실부터 전시가 이뤄지고 있었다. 양옆으로 각기 다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박공의 콘크리트 천장에서는 세월의 흔적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고 (아마 오랜 세월 누수와 싸워왔던 것으로 보인다.) 흔치 않은 비율의 길쭉한 공간에서는 아늑하게 늘어선 작품들을 관람하기 좋았다.



그리고 마침내 구정아트센터의 중심. 충청도의 ㅁ자형 전통가옥구조를 기반으로 설계되었다 하니, 이곳이 ㅁ자의 중심 공간이다. 벽돌로 감싸진 원기둥과 거북선 모양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목구조가 눈에 띈다. 어찌 보면 배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크지 않은 공간인데도 작지 않아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기 좋다. 전시도, 공연도, 그게 아니라면 작가의 북 토크 자리여도 좋겠다. 



이곳 또한 인공조명 없이 전시를 진행 중이다. 사방으로 높게 뚫린 창에서 빛이 들어온다. 창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근대의 건축가들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시뮬레이션이 가능한 지금 시대에서도 우리는 어두울 것이란 불안감에 잔뜩 천장 가득 조명을 박아 넣고 있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두 개의 원기둥 중 하나는 계단이고, 또 하나는 대칭을 맞추기 위한 작은 실이었는데 이 두 개의 원기둥이 공간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지금의 건축가들이라면 이렇게 육중한 원기둥으로 계단을 세우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간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런데 이곳은 좋다. 공간의 영역을 나눠주고, 공간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 버렸다.



가수에게 특유의 창법이 있고, 화가의 작품에서 보이는 그만의 화풍이 있듯 건축가에게도 그러한 특징들이 있다. 누군가는 건축가의 내면이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말할 것이고, 누구는 단순한 유행이고 스타일로 치부할 테지만 확실한 것은 결국 건축가의 개성이 건물에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차가운 건물을 설계하고, 또 누구는 따뜻한 건물을 만들어 낸다. 어떤 사람은 논리에 의해 건축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건축을 세상에 내보인다.


구정아트센터를 설명하는 표지판에는 구정아트센터가 나무, 흙, 돌, 바람에 따뜻한 온기와 생명을 담는다는 마음으로 설립되었다고 쓰여있다. 이타미 준은 정말 그런 마음으로 연필을 들었을 것이다. 


전시를 돌고, 공간을 지나오는 동안 어떤 인공적인 이질감도 느낄 수 없었다. 바깥의 햇빛은 내부를 밝히고, 바람도 쉬이 한 바퀴 기분 좋게 돌고 갈 것 같은 건물이다. 이타미 준은 이후 제주에 지었던 다른 건물보다 더 따뜻한 공간을 이곳, 온양에 처음 지어놓았다. 자연과 함께 지역적인 의미와 역사를 함께 담으려고 노력하며. 




이타미 준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다면, 다큐멘터리 영화를 한 편 보는 편을 추천합니다. <이타미 준의 바다>입니다. 건축을 알기 위해선 사진도 좋고, 글도 좋지만 건축의 모습을 담은 영상과 건축가의 목소리를 같이 들을 때 이해되는 어떤 부분이 분명 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qy1tIGlUwHc&ab_channel=YouTubeMovies




한 가지 더.



전시는 너와집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너와는 200년 이상 자란 소나무 토막을 도끼로 쪼개어 만든, 일종의 목재 기와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너와 지붕을 가진 집이라는 뜻의 너와집은 본래 강원도 삼척시에 있었던 것을 1983년 이곳 온양민속박물관에 복원해 냈다.



물에 젖고 마는 나무 조각을 지붕 재료로 썼다는 점이 흥미롭다. 현대에도 목재는 물과의 상성 때문에 건물의 외벽재료로 쓰는 것도 꺼리는데 지붕재료로 쓰다니. 그것도 도끼로 단번에 쪼갠 너와는 15년 정도 견디고, 톱으로 잘라낸 것은 5년을 넘기기가 힘들다고 하니, 언뜻 보면 불규칙하고 어설픈 모양새지만 쓰임은 또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부에서 전시가 진행되는 것이 마치 나오시마 섬의 아트하우스들을 연상케 했다. 이러한 접근이 좋았다. 오래된 가옥과 같은 공간을 무작정 보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쓰임이 있는 공간으로 다시 활용하는 것. 현대의 예술과 다시 만나도록 하는 것. 그러한 시도가 정말 반갑다.




온양민속박물관 안에 속해있는 구정아트센터와 너와집은 전시 일정에 따라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거나 혹은 닫아둔다고 합니다. 제가 방문했을 당시 전시하고 있었던 <일상의 유희>는 운이 좋게도 구정아트센터와 너와집 내부를 활용하여 전시를 진행하고 있어 입장이 가능했습니다만, 이후 방문을 예정 중인 분이 계신다면 온양민속박물관 홈페이지 등을 참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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