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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Aug 17. 2021

적당한 거리두기의 효용성

어라운드폴리

폴리, 흩어짐의 가능성


새로움은 언제나 공든 탑을 무너뜨리면서 온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축적된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가득 채워져 있던 것을 한꺼번에 비워버리면서. 그러니까 새로움이란 이유를 잊은 관습과 고정관념을 어떻게 벗어던지는지에 달렸는지도 모르겠다. 건축에서도 시기에 따라 크고 작은 새로운 움직임들이 있었지만, 1983년 신인 건축가였던 베르나르 츄미가 제안한 파리 라빌레뜨 공원 설계안이 새롭지 않았다고 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베르나르 츄미 이전까지의 건축은 응당 기능적이어야 했고, 효율적이어야 했으며, 예측 가능해야 했다. 그런데 츄미의 공원 설계안에는 목적이 사라진 10 m×10 m 정사각형의 공간, 폴리(Folie)가 120m 간격의 직각 그리드 위에 존재할 뿐이다. 공간을 나누고 찢어, 가상의 선들 위로 흩어 버린다. 목적이 없는 폴리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 의해 불확실한 이벤트가 발생되기를 기대하며 말이다.



제주의 서쪽, 성산읍에 위치한 어라운드폴리는 물론 이름부터 그렇지만 첫눈에 라빌레트 공원의 폴리를 떠올리게 했다. 넓은 대지 위에 흩뿌린 듯 위치한 작은 건물들은 텐트를 쳐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고깔모자의 모양 같기도 했으며, 부루마블의 게임 말처럼 읽히기도 했다. 굳이 통용되는 말을 붙이자면 독채펜션이라고 애써 구분해볼 수는 있겠으나, 한눈에 알다시피 일반적인 종류의 스테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룻밤 묵을 숙박시설을 방문하며 으레 예상하는 모습들이 있다. 흰색 라인이 가득 쳐진 지하주차장, 높은 층고를 가진 1층 로비, 조식을 먹으러 방문할 2층의 식당, 방향에 따라 가격이 다른 오션뷰와 마운틴뷰의 객실. 상상하는 높이가 다를 수야 있겠지만, 우리는 대부분 비슷한 모양의 호텔 건물을 떠올린다.

반면 어라운드폴리에서는 호텔에서 수직적으로 쌓이는 기능들을 모두 분리해 땅 위에 흐트러뜨리고, 땅의 곳곳을 비워두었다. 구역을 정확히 나누기보다는 느슨한 실타래들이 대충 어딘가를 묶어보려 했던 모양새에 더 가깝다.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위해 비워둔 공간들이 많다. 여지가 많다는 표현이 단어 그대로 알맞다.



어라운드폴리에서는 고깔 모양의 롯지, 카라반, 캠핑 트레일러, 텐트까지 고정되거나 움직일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스테이가 공존한다. 스테이뿐만 아니라 넓은 잔디밭에서 거대한 캠프파이어를 피울 수도, 여러 아티스트가 참여하는 페스티벌이 열릴 수도, 저녁이면 작은 영화제가 열리거나 플리마켓, 팝업스토어, 하다못해 운동회가 열려도 이상하지 않다.


이름표가 붙지 않은 박스 안에 우리는 더 다양한 물건을 넣을 수 있다. 규정되지 않은 것은 아마 열려 있는 가능성의 배경일 것이다. 어라운드폴리에서 많은 행위가 일어나고, 어떤 이벤트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롯지, 기울어진 벽과 뭉쳐진 기능


넓은 대지 안에 다양한 형태의 스테이를 해체해 놓았지만, '폴리'로 읽히는 각자의 스테이들은 오히려 응집에 가까운 구성을 보여준다. '롯지'라 불리는 일련의 독채 건물들은 희고 큰 고깔 모양의 건물을 중심으로 회색의 작은 고깔들이 하나둘씩 붙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큰 고깔이 현관과 거실로, 작은 고깔들이 붙으며 독립된 주방과 침실을 만들어내는 식으로 타입을 다양화한다.



롯지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거실, 주방, 화장실과 방을 구경하는 동시에 느껴졌다. 아주 세심하게 고려된 크기였다. 넓지 않았지만, 좁지도 않았다. 텐트처럼 기울어진 벽을 가진 비정형의 공간이었는데도 면적은 생활하기 충분했다. 오히려 군더더기가 없어 버릴 데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외관에서 보이는 기울어진 벽은 내부에서도 기울어졌다. 바닥과 직각으로 만나지 않으니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대신 기울어진 벽은 신선한 공간감을 제공한다. 내부를 구분 짓는 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획이 없다는 뜻이다. 기울어진 벽으로 반쯤은 영역을 구분해 내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좁은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기능들은 모두 갖췄다. 거실과 식탁, 주방, 화장실과 침실, 그리고 욕조까지. 가장 작은 로프트 롯지를 제외하고선 모든 롯지는 거실 한가운데에 돌음 계단을 놓아야 했는데, 돌음 계단은 가장 적은 면적과 부피를 차지하는 수직 동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마저도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얇은 부재를 사용해, 거실에서 하나의 오브제처럼 읽히기도 한다.





리바트 웹진 <힌지> 에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 전문은 아래 링크를 이용해주세요.


https://www.hyundailivart.co.kr/community/magazine/B200030689?typeCd=00002&sortBy=rgstdtime


PC로 볼 땐 텍스트가 가운데 정렬이지만, 모바일로 보면 좌측 정렬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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