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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Sep 01. 2021

일상에 쉼표를 찍고 싶다면

여정


1990년대 지어진 붉은 타일 건물 사이에 빼꼼, 무채색 건물을 발견했다. 이 건물은 2, 3층은 회색의 타일로, 4층은 흰색의 타일로, 5층은 회색면의 콘크리트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층마다 각기 다른 마감재의 종류처럼 창문도 모두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뚫려 있어 마치 크기만 비슷한 박스 여러 개를 어슷하게 쌓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타일로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리된 외관은 언뜻 일본의 건축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으나, 가장 꼭대기 옥상 부분에서 작은 아치 모양이 반복되는 귀여운 패턴을 발견하고 나서는 괜스레 웃음이 났다. '여정'이 위치한 건물 '여인숙'의 모습이었다.




전해지는 기억들


전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어떤 기억들은 구전되기도 하고, 기록되기도 한다. 실천되기도 하며, 복원되기도 한다. 동원여인숙이란 이름의 여관이 서 있던 이 자리에서 여정은 방 하나를 손님방으로 내어줌으로써, 이곳에 있었던 기억들을 재해석한다.


시작은 1인 가구 3세대가 공유할 수 있는 손님방이었다.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 편히 묵을 수 있는 손님방을 각 집에 마련하기는 어려우니, 하나를 만들어 공유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202호, 공유 손님방은 마치 옛 동원여인숙처럼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 지금의 여정이 되었다.



현관은 보통 거실과 5cm에서 10cm 정도의 단차를 가지도록 설계된다. 신발에서 나오는 먼지가 거실로 들어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또 시공적인 측면에서 거실엔 난방을 위한 온수배관이 지나가야하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런데 여정의 거실은 현관보다 30cm에서 35cm 정도 높다. 이러한 단차의 이유는 무엇일까. 임태병 소장님은 이 또한 이곳의 기억에서 왔다고 답했다.


옛 동원여인숙은 복도에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구조로, 복도에서 보면 방에 누군가 머무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형태로 운영이 되었다. 당시엔 연탄 난방을 사용했기 때문에 문이 바닥에서 높게 띄워져 있었고, 그러한 특징을 이어받아 여정은 훌쩍 툇마루에 오르듯 방 안으로 들어서는 경험을 하게 한다.



현관 옆에 놓인 방석에 앉아, 그 옆 소반에 방 열쇠와 휴대폰을 놓고서 신발을 벗고 현관 옆 넉넉한 깊이의 신발장에 모든 짐을 내려놨다. 그렇게 껑충 뛰어 올라 고즈넉한 여정의 밤으로 들어서게 된다.




창에 대한 강박을 버리면


한국인들이 특히 열광하는 건축의 요소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남쪽을 향하는 커다란 창일 것이고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한국인은 아마 몇 없을 것이다. 남쪽이면 남쪽일수록 좋고, 창은 커다랄 수 있는 만큼 커다래야 한다.


하지만 여정은 그렇지 않다. 여정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두 개의 창문은 건물의 측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측면엔 바로 옆 건물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선 창밖을 굳이 바라보지 않기로 한다. 대신 창 앞에 벽을 쌓고, 사이 공간에 정원을 두어 상부의 틈으로 들어오는 빛만을 받아들인다. 외부의 풍경을 바라볼 수는 없지만, 일부의 채광과 환기는 가능토록 한 것이다.



벽을 마주한 창은 여정을 가장 여정답게 한다. 해가 뜨고 지는 바깥 풍경의 급격한 변화를 이곳에선 느낄 수 없다. 어슴푸레하게 들어오는 은근한 빛은 여정의 방안을 아주 조심스레 밝힌다. 부산하지 않은, 고요한 움직임이다. 마치 나만의 아지트에 온 듯 어둑한 방 안 탁자에 놓인 책 속 활자에 집중한다. 음악을 듣고, 오랜만에 일기도 써본다. 여정에선 정오가 되어서야 햇빛이 창 쪽에 들어오니, 아침이 아주 천천히 찾아오는 셈이다. 그러니 평소보다 느지막이 침대에서 벗어나도 좋을 것이다.



남향에 대한 절대적인 선망을 이곳에선 약간이나마 덜어낼 수 있다. 하루 종일 큰 변화 없이 유지되는 은은한 조도로도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하루 새 금방 터득하고야 만다. 오히려 바깥보다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빛의 부재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부재가 예상치 못한 선물을 가져다 줄 때가 있다.





리바트 웹진 <힌지> 에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 전문은 아래 링크를 이용해주세요.


https://www.hyundailivart.co.kr/community/magazine/B200031735?typeCd=00002&sortBy=rgstdtime


PC로 볼 땐 텍스트가 가운데 정렬이지만, 모바일로 보면 좌측 정렬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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