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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Sep 12. 2021

하나부터 열까지 디자인

어베터플레이스

다시 채우는 빈 공간


건축은 아무래도 무겁고, 비싸다. 부동산이라는 이름이 뜻하듯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자리를 잡고 나면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오래된 옷을 지금의 유행에 맞춰 리폼하여 입는 것처럼 다른 방식으로 고쳐 쓴다. 이를 테면 호텔이었던 곳이 코리빙스페이스로, 공장이었던 곳이 전시장으로, 주택이었던 곳이 카페로 변모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봐왔다. 비슷한 용도로의 전환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시장이나 카페처럼 공간의 형태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유연한 프로그램들이 쉽게 수요가 있는 공간으로 스며들었다.


그렇다면 종각이라는 구도심, 맛의 거리 한복판 4층에 위치하고 있었던 DVD방이라면 어떨까. 그건 주택을 카페로 바꿔 사용하는 상황보다는 좀 더 까다로운 문제처럼 느껴진다. 더군다나 1, 2층도 아니고 4층까지 거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은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만으로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몇 년 동안 공실로 비어있었다는 것이 그를 반증한다. 새로운 용도로 바꿔 성공적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선 불특정 다수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이곳을 찾도록 해야 했다. 예를 들면 하룻밤 묵을 스테이처럼 말이다.



어베터플레이스의 골목에 들어서자 건물에 빽빽하게 매달린 간판들과 사람 키만 한 홍보 배너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곱창집, 부대찌개 집, 고깃집과 양꼬치집. 식사가 아니라면 LP바, DVD방과 코인 노래방. 마치 거대한 메뉴판처럼 보이는 거리에서 조심스레 어베터플레이스로 향하는 입구를 찾았다.



곱창집 옆 입구로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 문이 열리자 깔끔한 401호 현관이 나타났다. 앞서 거리의 현란함에 익숙해져 있던 눈이 그제야 조금 차분해진다. 문 옆의 작은 간판에 쓰인 이름이 수줍게 환영하고 있는 가운데, 미리 안내받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어베터플레이스의 문을 열었다.




경우의 수를 담는 벽


우리는 쉬이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오직 하나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만다. 그 편이 더 쉬우니까. 문제가 생기면, 공간에는 해답들이 쌓여간다. 책이 여러 권 모이면 책장을, 밤이 내려앉으면 조명을, 주방의 연기를 막기 위해 후드를, 콘센트가 없으면 몇 미터짜리 멀티탭을 사 와서 길게 바닥에 깔아 둔다. 


그런데 어베터플레이스는 여러 가지의 해답보다 하나의 만능열쇠를 꿈꿨던 것처럼 보인다. 딱 한 가지의 답으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공간을 둘러싼 노란 벽에 대한 이야기다.



정면을 향하고 있어야 할 수납공간들이 모두 옆으로 기울었다. 마치 노란색 종이 파일들이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쪽 방향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물고기의 비늘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칫 심심할 수 있었던 벽은 분할되었고, 그것은 곧 패턴이 되었다. 똑바로 서있던 벽은 방향성과 기능을 동시에 가지게 됐다.



하룻밤 동안 이 공간에 머물면서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이 필요할 것인지, 결국 어디로 손을 뻗게 될 것인지 치밀하게 모든 경우의 수를 전부 따져봤을 것이다. 노란색 벽 옆으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고 안쪽을 바라보면, 그 위치에서 쓰일 물건들이 나타난다. 라운지체어 옆에는 책들이, 식탁 옆에는 수저통이, 주방 옆에는 후드와 더불어서 행주와 고무장갑이 정해진 자리에 가지런히 꽂혀있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기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노란 벽 곳곳엔 콘센트와 USB 탭이 매입되어 있다. 




치열한 배려를 입은 디테일


공간에도 유행이 있고 스타일이 있다. 누군가는 오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적산가옥의 구조에 매료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텅 빈 공간의 노출 콘크리트 위 내려앉는 햇빛의 움직임을 오래도록 관찰하기도 한다. 미드 센츄리 가구들과 바우하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근대 건축의 흔적을 매만지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시대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지만 우리 모두 감탄하는 부분은 같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디테일 앞에서 감탄하고야 만다.



안쪽 현관에는 전신 거울이 있다. 거울이 없어 화장실 유리나 창문에 비친 실루엣 모습으로 외출 전 마지막 확인을 하는 불편을 덜었다. 또한 현관 옆에는 갑작스러운 우천을 대비하여 우산이 꽂혀있고, 가을과 겨울에 외투를 걸어 둘 수 있도록 외투 걸이가 직접 디자인, 제작되어 있었다.


어베터플레이스의 전등 스위치는 일반 스위치와는 다르게 동그란 레버로 이루어져 있다. 레버를 잡고 돌리면, 공간은 점점 밝아지거나 어두워진다. 개인의 취향과 쓰임에 맞춰 공간의 조도를 조절할 수 있다. 책을 읽거나 음식을 모여 먹을 때는 조명을 밝히고,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볼 때면 조명은 가장 어둡게 내린다.



주방에는 음식을 해 먹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집기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 무엇 하나 어베터플레이스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릇과 수저, 행주와 고무장갑, 세재와 수세미까지. 일반 슈퍼에서 별 고민 없이 골라온 물건들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은 가장 적게 머물지만, 동시에 가장 기능적이어야 하는 공간이다. 하루에 필요한 어매니티가 모두 구비되어 있는 것은 물론, 칫솔을 사용 후 꽂아놓을 수 있게 칫솔꽂이까지 마련했다. 아마도 사용한 칫솔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어야 하는 불쾌함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누는 재사용 없이 딱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크기로 디자인되었다. 화장실의 샤워 공간과 욕조 앞에는 가지런히 흰색의 도톰한 발수건이 깔려있다. 사용한 수건이 바닥에 버려지지 않도록, 세면대 아래에는 빨래 바구니가 기다리고 있다. 내가 다시 사용할 물건이 아니더라도, 함부로 다루지 않을 수 있는 배려가 돋보였다.





어베터플레이스는 지나치게 정제되어 보여 자칫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다. 흐트러진 부분은 없고, 각이 전부 딱딱 들어맞는다. 모든 것을 다 매입하고자 했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람 사는 곳 같지 않고, 정이 없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마음이 차가울 리 없었다. 이 공간에 맞는 가구를 제작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을 것이고, 재차 시뮬레이션을 반복했을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을 것이고, 구현하기 위해 몇 시간이고 토론을 했을 테다. 이름처럼 더 나은 공간을 위한 진심 어린 배려를 몇 번이고 발견할 수 있었던 하룻밤이었다.





리바트 웹진 <힌지> 에 실린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hyundailivart.co.kr/community/magazine/B200032351?typeCd=00002&sortBy=rgstdtime


PC로 볼 땐 텍스트가 가운데 정렬이지만, 모바일로 보면 좌측 정렬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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