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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Oct 21. 2021

숲 속에서의 깊고 느린 고립

숲 속의 오두막

차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깊은 숲 속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몇 개의 마감을 넘기고 어디엔가 숨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복작복작한 도시 말고, 디자인이 잔뜩 들어가 있는 숙소 말고 그보다는 조금 더 생각을 비울 수 있는 곳. 우리는 숲속의 오두막을 향해 출발했다.


예약 당시 사장님에게서 온 긴 메시지가 있었다. 다리를 지나, 바위 위의 화살표를 따라 올라와 꼭꼭꼭 연락을 달라던 사장님의 메시지에 우리는 갸웃했다. 요샌 내비게이션을 찍으면 다 알아서 갈 텐데, 왜 꼭꼭꼭 연락을 달라고 하실까? 또 영화는 USB에 담아 오라던 메시지에 친구들과 나는 여러 추측을 해야 했다. TV에 HDMI 선이 안 꼽히나? 요새 USB에 영화를 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넷플릭스나 왓챠는 볼 수 없는 건가?



숲속의 오두막 근처 길로 들어서자, 사장님이 왜 연락을 하라 하셨는지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라, 은유로써의 '숲속'인 줄 알았는데 여긴 정말 숲 속이었다. 포장된 도로가 사라지고 오프로드가 시작됐다. 마지막 편의점은 이미 한참을 지나온 후였다. 주차장으로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우고,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어디로 가야 오두막이 나오는지 예상할 수 없었다. 지도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몇 분 후, 사장님은 차량 옆면에 진흙이 그라피티처럼 튀겨져 있는 지프를 타고 나타났다. 오르막길을 앞에 두고, 짐을 모두 지프에 실으면 숙소까지 옮겨 주시겠다고 하셔서 짐을 모두 옮겼다. 예상과 달리 사장님은 지프에 우리는 태워주지 않았다. 다만 주차장 옆 통나무 다리를 건너 다섯 개의 화살표를 따라 걸으면, 곧 숙소 앞에 도착할 것이라 말하곤 다시 지프를 타고 떠났다. 우린 얼떨떨한 기분으로, 사장님의 안내에 따라 다리를 건너 숲 속으로 들어섰다.



편한 신발을 신고 온 것은 다행이었다. 갑자기 등산을 하듯 흙과 바위, 잡초를 밟으며 나무 사이를 걸어 올랐다. 늦여름의 바람이 잔잔히 불어왔다. 발 밑을 조심히 살피랴, 다음 화살표를 찾아내느라, 산책보다는 탐험에 가까웠다. 한 300m쯤을 걸어 올라갔을까, 처음처럼 다시 통나무 다리가 나왔고 그 뒤로 오두막이 보였다.



왜 사장님은 우리를 태워주지 않으시고 숲 속을 걷게 하셨을까? 하룻밤을 묵고 난 후 터덜터덜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우린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 숲 속에 왔다는 걸 느끼게 하고 싶으셨겠지. 그게 이곳의 입장 프로그램 아니었을까? 아마 그랬을 거야.




공간이 문화를 담는다는 것은


우리는 공간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라면 주방, 거실, 침실의 위치와 크기를 어느 정도 유추해 낼 수 있다. 우리는 아파트 공화국에서 자랐고, 비슷한 형태의 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났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같은 문화를 공유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숲속의 오두막은 예상을 유유히 비껴갔다. 흔히 보는 숙소의 구조라고는 볼 수 없었다. 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천장에 뚫린 천창으로는 빛이 새어 들어왔다. 들어가자마자 가장 중앙엔 업소용 냉장고가 있었다. 가운데의 공용 공간은 양 옆 두 개의 방이 공유하는 냉장고실이자, 창고이자, 전실이었다. 


숲속의 오두막에서 우리가 묵을 곳은 위계 없는 방 두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쪽은 주방이자 간이침대가 있는 침실이었고, 또 한쪽은 침실이자 거실이었다. 대개의 주택 혹은 펜션이 공간에 위계를 부여하고 거실과 주방을 묶는 것과는 달랐다.



발바닥으로 차갑고 단단한 타일의 질감이 느껴졌다. 바닥에 깔린 푸른 타일은 주방 벽에 붙여진 노란 타일과 함께 오두막의 색채를 부여했다. 주방은 콘크리트를 부어 만들고 이렇다 할 상판이 없는 채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곧 숲속의 오두막 안에 있는 모든 가구가 그렇듯 가구라기보다 필요에 의해 툭툭 만들어 낸 구조물에 더 가까웠다.



안쪽 방 안으로 들어서자, 비어있는 공간이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을 그대로 노출하고, 두꺼운 나무 판재로 침대를 만들고, 한쪽 구석엔 화로를 놓았다. 겨울에는 화로에 불을 지필 수 있었을 텐데, 늦은 여름엔 화로를 보고 겨울을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천장에 등은 없었다. 다만 공간 구석구석에 있는 작은 조명들이 은은히 공간을 밝혔다. 평소 생활하는 공간보다는 어두웠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자그마하게 주변을 밝히는 조명들은 공간을 조금 더 조용하고 차분하게 만들었다.



왜 USB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TV는 없었다. 빔프로젝터가 창문 앞에 설치되어 있었고, 건너편의 흰 벽을 향해 영상을 쏠 수 있었다. 접혀 있던 캠핑 의자를 펴고, 쪼르르 앉아 영화를 보기로 했다. 침실이기도 했지만, 옹기종기 모여 영화를 보는 영화관이기도 했다.


외국에 온 것 같았다. 유럽의 어느 에어비앤비처럼, 막상 닥쳐야만 어떤 공간인지 이해할 수 있는 곳. 예상했던 것이 없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있는 곳. 숲속의 오두막은 우리에게 낯섦을 잔뜩 안겨줬다.




하룻밤 정도는 괜찮잖아


유명한 브랜드의 어매니티도 없고, 폭신한 감촉의 샤워가운도 없었다. 화장대와 거울도 없어서 서로 거울이 없냐고 물었다. 냉장고가 바깥에 있어, 음식을 가지러 신발을 신고 바깥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작은 마당에서 바비큐를 할 때엔 눈앞에 나방이 휙 지나가기도 했고, 구석에선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장수풍뎅이도 봤다. 간이로 펼친 침대에서는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났다. 모든 것을 쾌적하고 훌륭하게 갖추려고 노력하는 요즘의 호텔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디자인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을 상상해 본다. 인스타그램도 없어서, 어딜 가든 멋진 사진을 찍지 않아도 괜찮았던 순간들도 분명 있었다. 앉고 싶으면 주변의 통나무에 걸터앉아 의자로 만들고, 테이블이 필요하면 커다란 나무판자를 구해 와 어떻게든 높이를 맞춰 고정하면 그만이다. 간단하고, 그게 그리 크게 어색하지 않다. 우리는 작은 전구 하나로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멋을 부리지 않아서 편안한 곳. 숲속의 오두막은 그런 곳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건너편 산세를 바라보며 사장님이 내려 준 커피를 마셨다. 지난밤 우리가 먹은 음식에 관해 이야기하고, 사장님이 키우는 커다란 반려견과 인사를 나누고, 사장님은 우리들의 사진을 찍어주셨다. 며칠 뒤 우리는 숲속의 오두막에서 짙은 녹음을 배경으로 한 흑백 사진을 몇 장 받게 됐다.




리바트 웹진 <힌지> 에 실린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hyundailivart.co.kr/community/magazine/B200033048?typeCd=00002&sortBy=rgstd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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