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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Oct 21. 2021

서촌에서의 가을 산책

보안스테이

서촌에서의 가을 산책


지금 사는 동네를 떠나야 한다면, 서울의 어디에서 살고 싶냐는 질문을 여러 사람에게서 받았다. 그중 서촌은 언제나 살아보고 싶은 동네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만약 한 계절을 꼽아 한 동네에 머물러야 한다면 나의 답은 주저 없이 가을의 서촌이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즈음 경복궁 나들이를 하고, 돌담길을 따라 느긋하게 걷고, 오래된 건물에 작게 들어선 가게들을 기웃거리면 어느새 하루는 금세 지날 것 같았다.



경복궁에서 서쪽, 조선시대엔 사대부와 중인들이 주로 살았던 지역인 서촌은 아직까지도 작은 골목길과 한옥을 보존하며 현대의 예술과 문화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동네다. 새로운 전시를 여는 미술관들이 있었고, 작은 갤러리들에서는 아티스트들의 개인전이 열렸고, 예술서적을 파는 서점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존된 한옥들과 새로 만들어진 공간들, 오래 그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과 날이 좋은 날 훌쩍 서촌으로 온 방문객들이 자연스레 섞여 서촌이라는 동네를 만들어 낸다. 서촌이라면 사람들의 머릿속엔 여러 장소들의 이름이 떠오르겠지만, 그중에서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있다. 수많은 문인들이 머물러 갔다는 보안여관이었다.




돋보이지 않기로 한 배려


1942년 지어진 보안여관은 2004년까지 실제로 60년이 넘는 세월 여관으로 사용되었고, 리모델링 후엔 건물의 외형과 내부를 최대한 유지한 채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다. 옛 보안여관 옆 자리에 새로 신축한 건물까지 함께 일컬어 보안1942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옛 보안여관을 포함해 새로운 건물의 지하 갤러리, 1층 카페, 2층의 서점, 3층의 스테이까지 모두 통칭하는 이름이다.



새로 지어진 신축건물은 건축가 민현식의 설계로, 옛 보안여관을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하며 지어졌다. 돋보이지 않기로 했다는 뜻이다. 보안여관 앞 도로를 건너서 거리를 두고 건물을 바라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을 뽐내지 않고 그저 보안여관 옆에 조용히, 옛 동네의 골목 풍경을 해치지 않도록 담백하게 그 자리에 섰다. 보안여관 바로 앞 보도를 걷는다면, 옛 보안여관과 신관이 2층에선 이어져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옛 보안여관의 붉은 벽돌과 같은 톤을 맞추기 위해 붉은 타일을 선택해 외장재로 썼다. 지상 1층의 카페에게 전면을 내어주고, 건물로 들어가는 주된 출입구는 골목길로 비켜섰다. 그것 또한 전시장으로써 탈바꿈한 보안여관을 위한 양보이기도 하다. 신관의 새로운 입구가 보안여관의 작고 낡은 입구를 제압하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보안여관의 출입구로 들어와, 2층을 통해 서점을 지나 신관으로 넘어오길 바라지 않았을까?



1층의 카페, 2층의 서점, 그리고 옛 보안여관을 다시금 재해석한 3층과 4층의 보안스테이는 각기 다른 창문 형태로 입면에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규칙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틀을 벗어난 것 같기도 한 창문의 형태는 옛 보안여관의 창들과 어우러져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보안스테이로 가기 전, 보안여관을 지난다. 이제는 다 갈라져 속살을 드러낸 나무 기둥과 서까래들이 보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 간 탓에 벗겨진 페인트들 안쪽으로 콘크리트 면이 드러나 있다. 보안1942는 옛 보안여관의 낡고 허름한 모습들을 그대로 보존한다. 그 덕에 쉽게 상상이 간다. 서촌 주민이었던 이상과 윤동주, 이중섭, 그리고 서정주 시인 등이 이곳에 모여 앉아 어두운 밤을 밝히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여러 밤들이 말이다.




돌담과 가로수 사이로



하룻밤 묵어 갈 보안스테이의 현관을 열자 두 개의 방이 공유하는 거실이 먼저 나타났다. 아담한 거실에는 밤새 실컷 읽을 수 있을 양의 책들이 꼽혀 있는데, 2층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 오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몇 권 들고 방으로 들어가도 좋겠다. 각종 소설들과 잡지와 만화책까지 구비되어있다.



다시금 예약한 방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면, 그제야 기대했던 풍경이 펼쳐진다. 네모난 창 뒤로 보이는 가로수와 그 너머의 궁궐,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햇빛을 마주한다. 나는 아마도 창문 프레임을 통해 이 풍경을 보고 싶어서 이곳에 하룻밤 머물기로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다. 방향에 따라 네모난 창문은 경복궁을 훔쳐보게도 하고, 인왕산의 끝자락을 저 멀리 내비치기도 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큰 가구 두 개가 나란히 자리한다. 공간 중앙에 놓인 침대는 여느 숙소처럼 필수적인 가구일 테고, 침대가 놓이고 남은 자리로 큰 원목 식탁에 짐을 내려놓았다. 하루 동안 이 원목 식탁은 커피 테이블이 되었고, 마주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책상이 되기도 했고, 아침엔 정말 식사를 하는 식탁으로 쓰이다가 종국에는 화장대 역할도 겸했다. 숙소에서 이렇듯 다양한 역할을 해내는 가구라니, 다른 곳에선 쉬이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높은 천장 아래로 펜던트 조명이 하나 내려온다. 곱게 휘어진 기다란 조명은 백지혜 작가의 작품으로, 방 안에 있는 작품은 그뿐이 아니었다. 창문 앞에 곱게 놓인 달항아리도, 방석과 현관 앞에 드리운 천도, 심지어 옷걸이까지 작가의 작품이 실제로 쓰이고 있었다. 여러 작품이 한 공간에 모여 다른 역할을 하며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은 꽤 생경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작가의 작품을 실제로 사용할 일이 몇이나 될까? 아티스트의 작품을 직접 만져보고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스테이에 머무는 손님들에게 제공함으로써, 보안스테이는 옛 문인들이 머물며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장으로써의 역할을 했던 것처럼 문화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체크인을 하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새하얗게 밝았는데 저녁에 가까워지니 창밖이 푸르스름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밝은 빛이 쏟아져 내부 조명을 켠 줄도 몰랐는데, 점점 내부의 노란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 개의 노란 불빛이 따뜻하게 공간을 아늑하게 감쌌다. 창밖으로 가끔씩 자동차가 지나다녀도, 방안은 아주 고요했다. 오랜만에 정말 조용한 밤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가로수 사이로 햇빛이 들어온다. 창밖의 가로수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의 그림자도 함께 움직였다. 달항아리 근처에서 넘실대는 햇살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서촌에서의 하루가 금세 지나가고,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리바트 웹진 <힌지> 에 실린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hyundailivart.co.kr/community/magazine/B200034473?typeCd=00002&sortBy=rgstd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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