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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Nov 19. 2021

강릉에서의 좋은 날

스테이시호일

강릉 가고 싶어


동해바다로 훌쩍 떠나곤 했던 것은 대학교에 입학하던 해, 3월이 채 되기도 전에 친구들과 떠난 겨울여행이 시작이었다. 버스를 타면 2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에 혹해서 바다를 보러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갔다.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속초였으나, 곧이어 방문한 강릉도 좋았다. 경포호 근처에 가기만 해도 이미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감돌아서 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백이면 백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다를 곁에 둔 도시들에는 서울과 다른 종류의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동해바다를 옆에 둔 도시들 중에서도 강릉이 특별한 이유는 나에게 강릉이 본가인 친구 차차가 있기 때문이다. 차차는 힘이 들고 괴로울 때마다 <강릉 가고 싶어>라는 제목의 노래를 틀었다. 기분 좋은 멜로디와 단순하게 반복되는 가사에 다른 친구들도 다 함께 따라 불렀다. 강! 릉! 가고 싶어! 그러고 나니 강릉은 나에게도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진 도시가 됐다. 친구의 집이 있는 곳. 누군가는 일상의 괴로움에서 도망쳐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 그러다 보면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강릉에 나의 집이 있으면 어떨까?




하룻밤, 강릉의 내 집


강릉의 남쪽, 강릉을 가로질러 흐르는 남대천 바로 위쪽에 위치한 남문동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는 주택가로, 강릉에 관광을 왔다면 쉬이 들어가게 되지 않을 골목길이었다. 남대천에 도착하여 안내받은 사진과 문구를 따라 하룻밤 묵을 오늘의 집인 스테이시호일을 찾았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는 주택들 중 깔끔하게 외관이 정리되어 있는 스테이시호일은 눈에 띈다. 작고 아담한 현관을 가진 1층과 외부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하는 2층. 딱 두 가구가 분리되어 살 수 있는 2층 벽돌집 1층의 문을 열었다.



사람의 첫인상은 외형과 더불어 처음 섞는 인사와 태도에 좌우되듯, 집의 첫인상은 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현관의 모습으로 결정된다. 은은히 새어 나오는 음악소리와 공간을 채우고 있는 향, 그리고 깔끔히 정리된 현관의 물품들과 외벽과 동일한 벽돌들을 쌓아서 만든 벤치가 어우러지며 하룻밤 묵어갈 오늘의 입주민을 환영하고 있었다.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하여 다시 쓸 때, 가장 재밌는 점은 집의 구조가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현관을 지나 만나게 되는 거실과 주방의 구조, 그리고 방과 화장실의 순서와 위치. 오래된 집들은 이러한 공간을 예상하게 하는 우리의 경험과 상식에서 살짝 빗겨 나 있다. 직접 문을 열어보기 전까진 문 뒤에 어떤 공간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눈으로 보고 직접 걸어봐야만 공간은 우리에게 익숙해진다.



아파트의 평면과 달리, 스테이시호일의 거실은 폭이 좁고 길쭉하다. 현관과 거실을 나누는 복도가 없이, 바로 거실로 진입하게 되고 길쭉한 공간 너머로 주방이 이어진다. 그를 보완하기 위해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벽면을 빈티지 의자 한 쌍과 티 테이블, 그리고 그 너머로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스탠드 조명과 오브제들이 채운다. 현관을 지나자마자 거실로 들어가기 전, 이곳엔 응접실이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본격적으로 사적인 공간인 거실과 주방으로 시선이 닿기 전, 가구로 분리되어 있는 이러한 공간은 경험에 순서를 만들어낸다.



거실은 공간에 맞게 제작된 소파와 함께 다이닝 실을 겸한다. 간단한 음식을 데워 먹을 정도의 공간인 주방에서 식사를 위한 기능은 떨어져 나와 거실에 흡수되었다. 소파 앞에 위치한 동그란 테이블은 커다란 펜던트 등과 함께 훌륭한 식탁으로써 역할을 해주었다. 식탁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힘이 있다. 식탁을 둘러앉아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게 됐다.



스테이시호일은 방이 두 개. 책들이 진열된 책장을 가운데에 두고 양 옆으로 나무 문짝 두 개가 자리한다. 문을 열면 두 사람이 넉넉히 잘 수 있는 침대가 하나씩, 옷을 걸어둘 수 있는 옷장과 거울이 하나씩 달려있다. 공간에 꼭 맞게 들어가 있는 침대는 마치 어렸을 적 구석진 장롱에 들어가 아늑함을 느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어둑함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고, 공간을 다정하게 한다.




작은 물건들의 색깔과 질감



공간은 큰 구조로 읽히기도 하지만, 오히려 작은 물건들의 색깔과 질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스테이시호일 곳곳에 깔려 있는 카펫은 공간의 온도와 질감, 그러니까 분위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만약 딱딱하고 고른 회색 바닥만 계속되는 곳이었으면 이만큼까지 매력적으로 공간으로 읽히지 않았을 것이다. 바닥의 다른 질감들은 여러 재료들도 쉬이 감싸 안는다. 노출된 옛 콘크리트 벽들과 새로 제작된 나무 합판 가구들과 빈티지 가구들과 조명들이 한 곳에 뒤섞여 있는데도 어색하지 않다. 오랫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스테이시호일은 넓이에 비해 다양한 조명을 사용한다. 천장에는 최소한의 스폿 조명만 두고, 스탠드와 벽등 그리고 펜던트 등으로 공간 곳곳을 밝힌다. 스테이시호일의 초입에서 만나는 스탠드 조명부터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펜던트 등, 주방을 밝히는 스탠드 등과 침실 벽에 달려 있는 벽등까지. 다양한 종류의 조명들은 공간을 밝힐 뿐 아니라 동시에 다양한 형태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그것만으로 부족할까 봐 침실엔 밝기를 조절할 수 있는 디밍 스위치까지 달렸다.


나에게 편한 조도를 찾아낸다. 너무 환하지도 않고, 너무 어둡지도 않은. 여러 스위치들을 껐다 켰다 하며 나의 밝기를 찾아내고 나면 그곳은 그렇게 나의 공간이 된다. 생각보다 빛의 힘은 크다.




소파에 기대어 차차에게 강릉에서 무얼 먹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차차는 어렸을 때부터 먹었다는 떡볶이 집을 한 군데 소개해줬다. 강릉에서 머무는 그날 저녁, 스테이시호일에서 슬리퍼를 신고 나와 터덜터덜 걸어 중앙시장 쪽으로 걸었다. 떡볶이와 튀김을 금방 사서 돌아와, TV를 켜고 수다를 떨며 즐거운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집에서와 다를 것 없이, 특별할 것 없이 강릉을 하루를 살아낸 것 같은 저녁이었다.





리바트 웹진 <힌지> 에 실린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hyundailivart.co.kr/community/magazine/B200035204?pagecode=D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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