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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Sep 20. 2021

축축한 숲 속의, 약간 눈이 매운 연기 같기도 한

<향수>

1


인생 첫 향수를 구매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동네 문구점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새로운 문구류를 사모으는 것을 좋아했던 그때 그 초등학생은 '딱따구리'라는 이름을 가진 문구점에서 파란색 라벨이 붙은 향수를 한 3000원쯤 주고 구매한다. 한 대여섯 가지 종류의 향이 있었지만, 나는 그 와중에 꽃 향기도 비누 향도 모두 마다하고 쿨워터 향수를 구매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향수를 즐겨 뿌리는 나이는 아니었어서, 아마 몇 번 뿌리고선 다 쓰지 못했다.


20년쯤 지나, 그때 그 초등학생은 향수를 종류별로 사 모으지는 않더라도 가끔 본인을 위한 선물로 향수를 구매해서 사용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다만 취향은 그 이후에 조금 바뀌어서, 이제는 시원한 향보다는 우디하고 스모키 한 향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달고 진득한 향도, 가벼운 꽃향기나 과일 향도 취향이 아니어서 오래도록 향수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요새는 비에 젖은 축축한 숲 속을 닮은 향기도, 장작을 타닥타닥 피울 때 나는 연기를 닮은 향기도 향수로 많이 만들어져 선택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 아닌가. 그저 내가 몰랐던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향을 가진 향수를 뿌리지만 가끔은 내가 그 향에 익숙해져서 뿌리고도 향을 잘 못 맡을 때가 많아서, 그럴 때면 내가 좋아하는 향은 내가 뿌릴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뿌려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때때로 내 향수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다른 사람의 향수를 빌려 뿌려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하루 종일 그 사람의 향수 냄새를 맡게 된다. 낯설기 때문이다.




2


올해 본 전시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전시는 5월, 플러스준스튜디오에서 최랄라 전시였다. 최랄라 씨의 사진도 물론 기대가 되었지만, 플러스준스튜디오가 오래된 교회를 리모델링하고 진행하는 첫 전시였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전시보다도 공간이 기대되어 방문했다.



높은 층고보다, 깊숙하게 들어오는 햇빛보다 더 놀라웠던 점은 공간을 채우고 있었던 향이었다. 최랄라 씨의 전시는 바이레도와의 협업으로 공간 전체에 향수를 뿌려두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공간과 사진은 더 긴밀하게 엮인 것처럼 느껴졌다. 작가가 의도했던 상실과 방황의 감각들이 사진 속에서도,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향에서도 묻어났다.



바이레도의 믹스드 이모션이라는 이름의 향수는 전시 후에도 계속 마음에 남아, 결국 전시를 보고 난 후 나는 사진은 사지 않았지만 향수는 구매했다.




3


날이 시원해져서 그런가, 가끔은 사무실에서 멀쩡하게 일을 하다가 소리친다. 아, 여행 가고 싶어! 아마도 일을 시작하고 난 후, 이맘쯤이 되면 개천절과 한글날을 묶어 어디론가 훌쩍 떠났던 여행들이 몸에 익어서 그런가 보다. 지금은 떠나지 못하니, 결국 나중에 여행을 가면 어떤 일들을 할지 계획을 세우고 상상을 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다음에 해외여행을 가게 된다면, 나는 새로운 향수를 하나 사서 여행 내내 뿌릴 작정이다. 오래도록 그 여행의 순간들을 더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향수 자체가 여행이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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