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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부분 Sep 06. 2021

달라야 아름다운 것

<악기>

 기억을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내가 처음 연주해 본 악기다운 악기는 피아노였다.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것은 일곱 살 즈음이었을 거다. 동네 아이들이 다 다니던 곳이어서 나도 이삼 년은 꼬박 다녔던 것 같은데, 얇은 석고보드 벽을 사이에 두고 전자 피아노, 스탠드업 피아노가 빼곡히 들어서 있던 기억이 난다. 딱 한 대 있던 그랜드 피아노 학원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자리에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고 전시되듯 놓여 있었다. 그 피아노가 연주되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아무래도 내 또래의 자녀를 둔 학부모가 상담을 왔을 때를 대비한 전략이 아니었나 싶다.


 친구들과 함께 학원에 다니기는 했지만 나는 누군가와 노는 것보다 작은 방의 문을 꼭 닫고 피아노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더 좋아했다. 선생님이 옆에 앉아 지난번에 배운 곡을 쳐 보라고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열심히 연습을 했지만, 십여 분 남짓의 레슨이 끝나고 나면 후련한 마음으로 건반을 두드렸다. 좋아하는 피아노 방(주로 구석진)에 자리가 비면 후다닥 악보 가방을 들고 자리를 옮기고서는 벽 너머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냥 앉아 있다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나서였을까. 엄마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중고 스탠드업 피아노를 한 대 사 주었다. 나에게만 주는 거라고 하기엔 너무 큰 선물이었기 때문에 나는 엄마도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엄마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다. 나는 가끔 피아노를 치다 말고 윗부분의 뚜껑을 젖혀 그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현과 해머가 빼곡히 들어찬 피아노 속을 보고 있자면 내가 알던 피아노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피아노 안의 현은 모두 길이가 달랐고, 건반을 가볍게 누르면 해머가 현을 향해 다가갔다. 피아노 현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건반을 눌러보기도, 해머 말고 다른 걸로 현을 때려 보기도 했던 게 피아노에게는 좋지 않았겠지만, 피아노의 속을 들여다보고 장난치는 게 이유 없이 즐거웠다.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운 다음에는 바이올린을, 플루트를 차례대로 배웠다. 운지 방법 정도만 익히고 말긴 했지만, 할 수 있을 때 다양한 구조의 악기를 배워 볼 수 있던 건 꽤 큰 행운이었다. 플루트를 배우면서는 작은 듀엣 공연도 했고, 재즈 공연을 찾아봤고, 조금 더 나이를 먹고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찾아 들었다. 다양한 악기가 만나서 완성도 있는 하나의 곡을 만드는 순간이 긴장되면서도 아늑하고 편안했다.


 최근에는 유튜브를 보다가 싱크룸이라는 플랫폼을 알게 됐다. 코로나 시대에 발맞추어(?) 온라인에서 여러 사람들이 만나 합주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처음에는 키보드, 베이스, 일렉, 드럼 정도의 밴드 악기로만 구성되는 줄 알았는데, 클라리넷, 바순, 피리, 아코디언, 하모니카까지 정말 다양한 악기가 모여서 합주를 한다. 각각의 연주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악기의 조합으로 만났을 때, 온라인에서조차 즉흥으로 연주를 해낼 때 정말 매력이 넘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때때로 그런 것처럼,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야만 나올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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