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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Sep 05. 2021

피아노, 아니 이건 피아노 학원의 기억

<악기>

내가 다녔던 피아노 학원은 동네 골목 사거리 교회 1층, 작은 간판을 달고 운영되고 있던 곳이었다. 피아노 선생님은 나와 같은 동네에 살았고 피아노 학원이 자리한 바로 그 교회에 다니던 기독교 신자였으나, 나는 피아노 학원만 드나들고 교회는 다니지 않았다. 아마 선생님은 일요일마다 교회에서도 피아노를 쳤을 것이다. 한 번쯤 나에게도 교회에 나오라고 권유할 수 있었겠으나, 선생님이 나에게 그런 제안을 했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그랬으면 난 좀 곧바로 인상을 쓰며 싫어했을 어린애였다.


피아노 학원은 주 2회에서 3회, 빼놓지 않고 다녔다. 집에서 투니버스를 보다가도, 정해진 시간이 다가오면 벌떡 일어나 걸어서 5분 거리인 피아노 학원으로 향했다. 말도 없이 학원을 빼먹거나 미룬 적은 없었다. 그건 아마도 피아노를 좋아했다기보다, 피아노 학원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이 좋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나는 분명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학원에 갔는데 왜 기다려야 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든 피아노 한 대와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공간인 방이 다섯 개 정도 있었고, 모두가 그 안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나는 방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방밖에는 현관을 포함해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공간이 있었고, 안쪽으로는 바닥에 앉을 수 있도록 마련된 작은 거실이 하나 있었다.


항상 같은 주기로 피아노 학원을 갔으니, 동일한 시간에 만나는 친구들이 있었다. 작은 거실에서 나와 친구들은 쪼그려 앉아 만화책을 보거나 옹기종기 모여 게임을 했다. 대개는 공기놀이였고, 공기는 꽤 엄격한 규칙을 가진 치열한 싸움의 장이었다. 다른 공기알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바로 턴을 빼앗겼고, 눈높이보다 높게 공기알을 던져도 안됐고, 점수를 위해 꺾기를 할 때도 공기알들을 손등 위에 놓고 흔드는 행위도 불법이었다. 다른 이의 플레이를 눈에 불을 켜고 봤다. 그러다 선생님이 차례가 되었다며 방으로 안내해 주실 때에는 마지못해 일어나며 다음 승부를 기약하곤 했다. 떠들썩했던 한바탕 승부를 끊고 들어온 피아노 방은 처음 몇 분 동안 낯설게 느껴졌다. 



피아노방은 옆방에서 치는 피아노 연습 소리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스란히 전해지는 곳이었다. 마주한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면서, 나는 오늘 내가 쳐내야 할 곡의 반복 횟수를 헤아렸다. 선생님은 나의 손을 붙잡고 두세 번 정도 곡을 반복해 알려주셨고, 손이 익을 수 있도록 10번 정도를 연습하고 당신을 부르라며 방에 혼자 나를 두고 나가 다른 친구들을 봐주셨다. 이제 혼자 피아노를 칠 시간. 나는 좀 그 시간들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오른쪽 피아노 건반의 끝에 놓인 볼펜을 가지고 횟수를 세었는데, 언제나 횟수를 뻥튀기하고 싶은 번민에 시달렸다. 선생님은 초등학생 꼬마의 뻥을 쉽게 눈치채셨을 것이다.


피아노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다른 악기들을 다룰 때도 나의 태도는 비슷했다. 나의 움직임에 따라 음을 내는 악기들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반복할수록 테크닉이 늘어간다는 것 말고는 큰 보람을 느끼지 못했는데, 피아노 선생님은 나의 성실함(아마도 공기 대회에 참여하러 가는)을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라 착각하셨고, 나를 많이 예뻐해 주셨던 기억이 어렴풋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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