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오랫동안 서랍에 넣어놨던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22장 정도가 찍혀 있었고, 15장 정도 찍어야 현상을 할 수 있었다. 필름은 기본적으로 36장이지만, 꽤 자주 37장까지 찍히곤 한다. 별일은 없지만,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15장을 채워보기로 했다. 이미 찍혀 있었던 22장 안에는 어떤 사진이 들어있는지 전혀 감도 안 온다. 그게 궁금해서 현상하기로 했다.
겨울이라 공기 중의 빛까지 파란색 물이 들어있었다. 겨울엔 이상하게 하늘이 더 파랗고, 모든 것들에 파란빛이 잘 스며든다. 올 겨울 중 제일 추운 날씨라는 둥,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진다는 둥 겁을 주는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잠깐씩 들고 다녀서 그런지 다행히 카메라가 얼어 작동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태백산과 소백산을 올랐던 10년 전 겨울들이 떠올랐다. 핫팩으로 카메라를 꽁꽁 감싸서 품에 넣어뒀다가 얼른 꺼내어 한 장 찍고 그랬다.
충무로에 사무실이 있었을 땐 점심을 먹으러 나가서 13536에 현상을 맡기곤 했는데, 합정동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는 현상이 힘들어졌다. 삼각지에 13536이 두 번째 가게를 오픈했는데, 삼각지엔 마땅히 갈 일이 없어 지금껏 한 번도 방문을 해보질 못했다. 픽셀퍼인치라고 하는 곳이다. 오전에 후딱 다녀오려고 했는데, 12시에 오픈하여 시간이 잘 맞질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랜만에 혜화의 홍포토로 향했다. 오래된 사진관이다.
홍포토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주는 사장님에게 왠지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작년 9월에 맡겼던 필름 뭉치들을 되돌려 받으면서, 필름 값이 너무 올랐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장님과 한담을 나누었다. 필름 값이 얼마나 빠르게 오르고 있는지, 필름을 찍는 사람들은 많이 소비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전체적으로 보면 아주 극소수이고, 필름현상소가 서울에만 3000개가 넘었다가 30개가 되었지만 예전만큼 일이 없어졌다는 이야기까지. 나는 컬러필름을 3000원 대로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 컬러 필름 한 롤 가격은 16000원을 돌파했다. 사장님은 물가상승률을 생각하면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보기 힘들다고 하셨는데,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나는 필름이 아주 저렴했던 시절에 사진을 시작했다.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메일이 왔다. 한 롤이라도 바로 작업해 주셔서, 엄청난 스피드다.
필름에는 작년 여름의 시간이 들어있었다. 월미도 배를 타고 찍은 사진들과 충무로 사무실에서 고양이 호옹이를 찍은 사진들, 그리고 몇이 좋았던 어느 날들이 함께 담겨 있다. 사진에 나온 사람들에게 사진을 전해주었다. 카메라를 요 근래 가지고 다니며 찍은 15장의 사진들도 함께 받았다. 운전을 하다 신호에 걸려 찍은 사진들과 합정동 사무실에서의 고양이 사진들과 건물 사진들이 있었다.
필름은 도대체 뭘까. 그저 특정 색감과 텍스쳐로 보여주는 것일 뿐인데도 일상을 굉장한 추억처럼 만들어준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필름을 왕창 사서 쓸 텐데, 새해에는 조금 더 지속적으로 찍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