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책장의 어떤 칸 안에는 초등학교부터 써왔던 일기장이 빼곡하다. 일기장으로만 책장의 두 칸 정도가 채워졌다. 나는 많은 날들을 책상에 앉아서 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썼다. 10대와 20대까지는 펜을 손에 들고 날짜를 먼저 적으며 일기를 시작했다. 매일은 아니어도, 인상 깊은 일들이 일어난 때면 그랬다. 특히 여행에 가면 많은 것을 썼다.
당시의 일기는 누구에게도 보여줄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숨기거나 부풀리지 않아도 되었다.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는 의도가 가장 컸는데, 다시 펼쳐볼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 기록이 무엇을 위한 일이었는지 지금에 와서는 의문이다. 아마도 나에게 넘쳐나는 감정을 조금씩 덜어내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아주 좋거나 아주 싫을 때 썼다. 그럴 때면 마음이 금세 울렁이기를 멈추고 잔잔해졌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그릇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작은 편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그보다 넘치는 감정이 나에게 생기는 날이면 나는 조금 괴롭다고 느꼈다. 누구나 힘이 들 때면 그것을 덜어내고 싶은 것이 당연할 텐데, 나는 때로 무언가가 과하게 좋아지는 날이 오면 그것마저도 덜어내고 싶었다. 남들이 듣기엔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랬던 때가 있었다. 일기장에는 그런 날들이 적혔다.
또 다른 사람들과 나의 다른 점을 느낄 때면 그것을 적어내려 갔다. 나랑 다른 부분을 마주했을 때, 나는 그 사람을 흥미롭게 여기기도 했고 불편하게 여기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그런 단편적인 사실들을 기록하기를 원했다. 아마 당시에 MBTI를 지금처럼 알았더라면 나의 일기장은 조금 얇아졌을는지도 모르겠다. 내 일기장의 내용은 굉장히 TJ 같이 서술되고 있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남았을 때도 일기장을 펼쳤다.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지만 불편한 일들을 겪었을 때 그러했다. 요새로 따지면 전장연과 차별에 대해서 썼을 것이고, 건축사협회에 가입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 쓰면서 불합리와 불공정함에 대해 물음표를 마구 던지며 일기장에게 토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하지 않는다.
어느새 일기장은 멈췄다. 끝은 요란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씩 뜸해지다가, 아무 날도 아닌 날을 기점으로 나는 더 이상 일기 쓰기를 멈추게 되었다. 이유는 없었고, 시간이 없어졌다는 말은 핑계일 것이다. 더 이상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보다 투두리스트를 지워나가는 일을 먼저 하게 되었다. 투두리스트는 지워도 지워도 차오르는 속도가 더 빠르다. 일기장에 눈길 돌릴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과 같이. 나는 언젠가 다시 일기를 쓰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