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오랫동안 일기를 썼다. 꾸준하게, 어쩌면 강박적으로.
어릴 때 쓰던 일기장이 있다. 매일의 기록이라기보다는 감정의 쓰레기통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감정이 요동치던 학생이었다. 중2병, 사춘기, 어쩌면 약간의 우울. 나는 감정이 끓어오르면 화풀이하듯 일기장을 펴 글을 적어내렸다. 짧은 메모 한 두줄일 때도 있었고, 공감가는 노래 가사를 적기도 했다. 꼼짝않고 몇시간씩 앉아 써내려갈 때도 있었다. 그렇게 쓰고나면 감정은 한결 차분해졌다.
나의 일기는 스무살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변한다. 일기장은 감정의 배설창구에서 일상의 기록으로 바뀌었다.
스무살에 맞이한 세상은 온통 새로운 것들로 가득했다. 새로운 곳, 새로운 경험, 새로운 사람들이 일상에 들어찼다. 재미있는 나날이 많아졌고, 나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었다. 흐려지는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 있기 위해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을 했다. 감정보다는 내게 일어난 일을 위주로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 날 먹은 것, 방문한 곳, 만난 사람들을 간단히 적었다. 꾸준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억들이 소멸되어버렸지만 때론 일기장에 쓰인 활자로 인해 마법같이 떠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그런 순간들을 위해 나는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기록을 이어갔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면서 내 일기는 또다시 변화를 맞이한다. 매일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일들이 생겼던 20대 초반과 달리, 날이 갈수록 일상은 단조로워졌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하루 8시간, 매일 똑같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다. 특별히 기분나쁜 일도, 좋은 일도 없다.
일하는 시간 빼고, SNS 채널을 보며 낭비하는 시간 빼고나면 내게 남는 시간은 몇 시간 되지 않는다. 부스러기 같은 순간을 거르고 나면 도무지 일기장에 적을 것들이 없었다. 내 일기장엔 점점 빈칸들이 많아졌고 몇년전부터는 일기쓰기를 관뒀다.
최근에 집을 정리하면서 예전에 썼던 일기장을 꺼내봤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일기장 속에 살고 있었다. 현재의 나로서는 도무지 감당하지 못할 인간도 있었고, 지금의 나와는 다른 에너지가 넘치는 인간도 있었다.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변했다. 특히나 점점 차분해지는 감정이 눈에 보였다. 거세게 일던 해일같은 것이 이제 호숫가의 잔잔한 물결과 비슷해졌다. 당연한 것 같기도 했고, 서글프기도 했다.
내가 적은 일기를 읽어가다보니 다시 일기가 쓰고 싶어졌다. 작년 말, 회사를 그만두고 난 후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결국 시선이 향하게 되는 건 '나' 자신이다. '나'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자 자연스레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그래서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월 1일부터 쓰기 시작해서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났다. 과연 2023년의 일기장은 어떻게 마무리 될 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치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고 보았을 때 변화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기록이 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