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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부분 Jan 09. 2023

재미있고 맛있고 웃긴 날이었다

<일기>

주위의 몇몇 사람들을 지켜본 결과, 편지를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일기를  쓴다. 사실 그들의 일기를 읽어  적은 없지만 편지를  쓰는 사람은 비밀을 좋아하면서  아는 사람일 테고, 그럴수록 혼자서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도 아주 많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편지를 잘 쓰는 사람이 못 되기에, 처음 일기를 쓸 무렵을 떠올려 보자면, 일기에 무엇을 써야 하는지 몰라 곤란했다.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검사를 맡아야 하는 일기였기 때문에 그건 일기라기보다는 알림장처럼 기록하는 일에 가까웠다. 그곳에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쓰는 건 맨 궁둥이를 보여 주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제와 그저께와 오늘은 분명히 아주 다른 날들이었는데, 놀랍게도 일기 속 나의 마음은 재미있었거나 맛있었거나 웃겼다 세 가지로 마무리지어지곤 했다.


자꾸자꾸 바뀌는 내 마음의 크기와 모양에 맞추어 일기장의 모습도 변했다. 짧은 글 위에 그림을 꼭 같이 그려야 했던 일기장, 사진이나 티켓을 붙여 놓던 일기장, 줄 간격이 넓은 일기장, 좁은 일기장, 열쇠를 걸어 놓고 친구와 함께 쓰던 일기장, 눈물이 점점이 묻어 쭈글거리던 일기장 등등. 조금씩 넓고 다양해지는 마음이 조근조근 쓰였다.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잘 숨겨 놓았지만 아마 누군가는 분명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열어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일기를 한 권 다 쓸 때마다 왼쪽 윗단에 동그랗게 구멍을 뚫고 은색 고리로 엮어 놓았다. 그게 한 박스가 되고 두 박스가 될 때까지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그 많던 일기장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


내 허락 없이 타인이 나의 일기장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서는 어디에도 일기를 잘 쓰지 않게 되었다. 드러낸 날것의 마음은 부끄러워 기록되지 않았으면 한다. 남게 된다고 하더라도 짧은 단어로 꼭꼭 걸어 잠그고 싶다. 그게 좋지 않은 마음일 때 더 그렇다. 그래서 대신 많이 찍게 되었다. 글로 남기기 싫은 것들은 사진이나 그림이 되어 남기면 나만 알 수 있는 감정이나 장면, 기억이 쉽게 떠오른다. 휴대폰만 꺼내서 버튼 몇 개 누르면 되니 참 쉬운 세상에 살고 있다 싶다.


요즈음은 놀라울 만큼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매일을 전혀 다른 마음으로 보낸다.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일기를 쓸 수 있는 체력과 시간이 주어진다면 몇 시간이고 마음을 써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물 같다가 불 같다가 바람 같은 마음이 쌓여 간다. 일기를 쓴다면 정리는 못 하더라도 딱딱하게 굳어 묻혀 있는 마음을 갈아엎을 수 있을지 모른다. 조만간의 일기장에는 오늘은 참 재미있고 맛있고 웃긴 날이었다고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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