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주위의 몇몇 사람들을 지켜본 결과, 편지를 잘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일기를 잘 쓴다. 사실 그들의 일기를 읽어 본 적은 없지만 편지를 잘 쓰는 사람은 비밀을 좋아하면서 잘 아는 사람일 테고, 그럴수록 혼자서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도 아주 많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편지를 잘 쓰는 사람이 못 되기에, 처음 일기를 쓸 무렵을 떠올려 보자면, 일기에 무엇을 써야 하는지 몰라 곤란했다.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검사를 맡아야 하는 일기였기 때문에 그건 일기라기보다는 알림장처럼 기록하는 일에 가까웠다. 그곳에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쓰는 건 맨 궁둥이를 보여 주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제와 그저께와 오늘은 분명히 아주 다른 날들이었는데, 놀랍게도 일기 속 나의 마음은 재미있었거나 맛있었거나 웃겼다 세 가지로 마무리지어지곤 했다.
자꾸자꾸 바뀌는 내 마음의 크기와 모양에 맞추어 일기장의 모습도 변했다. 짧은 글 위에 그림을 꼭 같이 그려야 했던 일기장, 사진이나 티켓을 붙여 놓던 일기장, 줄 간격이 넓은 일기장, 좁은 일기장, 열쇠를 걸어 놓고 친구와 함께 쓰던 일기장, 눈물이 점점이 묻어 쭈글거리던 일기장 등등. 조금씩 넓고 다양해지는 마음이 조근조근 쓰였다.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잘 숨겨 놓았지만 아마 누군가는 분명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열어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일기를 한 권 다 쓸 때마다 왼쪽 윗단에 동그랗게 구멍을 뚫고 은색 고리로 엮어 놓았다. 그게 한 박스가 되고 두 박스가 될 때까지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그 많던 일기장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
내 허락 없이 타인이 나의 일기장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서는 어디에도 일기를 잘 쓰지 않게 되었다. 드러낸 날것의 마음은 부끄러워 기록되지 않았으면 한다. 남게 된다고 하더라도 짧은 단어로 꼭꼭 걸어 잠그고 싶다. 그게 좋지 않은 마음일 때 더 그렇다. 그래서 대신 많이 찍게 되었다. 글로 남기기 싫은 것들은 사진이나 그림이 되어 남기면 나만 알 수 있는 감정이나 장면, 기억이 쉽게 떠오른다. 휴대폰만 꺼내서 버튼 몇 개 누르면 되니 참 쉬운 세상에 살고 있다 싶다.
요즈음은 놀라울 만큼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매일을 전혀 다른 마음으로 보낸다.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일기를 쓸 수 있는 체력과 시간이 주어진다면 몇 시간이고 마음을 써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물 같다가 불 같다가 바람 같은 마음이 쌓여 간다. 일기를 쓴다면 정리는 못 하더라도 딱딱하게 굳어 묻혀 있는 마음을 갈아엎을 수 있을지 모른다. 조만간의 일기장에는 오늘은 참 재미있고 맛있고 웃긴 날이었다고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