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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Sep 13. 2016

작지만 다양한 면을 가진 장소

상왕십리, 리사르 카페로스터스

장소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장소를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여러 방식이 있어서 누군가는 공간을 들어가서 느껴지는 향기에, 누군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의 경우에는 건축을 하고, 사진을 찍어서 그런지 시각적인 면에 크게 반응한다. 어디서 들어와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풍경은 무엇인지, 빛은 어디서 쏟아져 들어오는지, 천장과 바닥은 어떻게 생겼는지.


얼마 전, 친구는 가고 싶은 카페가 생겼다며 주말에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왕십리 카페는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리사르 카페로스터스라고 하는 곳이라고 했다.


궁금한 장소가 생기면, 블로그보다는 인스타에서 해쉬태그 검색을 더 자주 한다. 블로그에서보다 더 정성 들인 사진들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아마도 묶어서 올릴 수 없어서리라. 그리고 리사르 카페로스터스를 검색했을 때, 모두 다 한 뷰에서 찍은 사진을 거의 대부분 올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공간의 한 면만이 인스타를 도배하고 있었어서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공간의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인스타를 도배한 이미지. 오래된 브라운관 TV와 자개 장.


카페가 들어서기에 좋은 입지라고는 할 수 없는 상왕십리 골목의 빌딩 지하, 두꺼운 철문을 용기를 가지고 열어야 만날 수 있는 리사르 카페로스터스는 내 생각보다 좁았다. 공간을 파악하고 말고를 고민할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한눈에 모든 공간이 눈에 들어오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카페가 원룸이었다. 로스팅부터 커피머신이 자리 잡은 곳, 카운터, 좌석까지 모조리 한 공간에 들어가 있었다. 요새 많은 카페에서 로스팅 룸을 따로 구분해 마련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커피가 만들어지는 곳 또는 창고 또는 입구 또는 좌석


커피를 내리는 공간은 기능적이었다. 어디서 로스팅을 하고, 커피를 어디서 내리고, 어디서 손님을 맞이해 주문을 받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그 공간의 역할이 칼 같이 나누어져 있다는 뜻이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카운터다운 카운터도 없었다. 그저 짐을 놓아두는 탁자 또는 책상 위에 메뉴가 인쇄되어 있었고, 카드 리더기가 있고 그게 다였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필요한 것만 있었다.


리사르 카페로스터스에서 가장 큰 테이블


리사르 카페로스터스에서 다섯 명이 넘게 모이는 모임을 진행하고 싶다면, 아마 카페 전체를 빌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장 큰 테이블은 아마도 아주 옛날 집 거실에서 쓰던 티테이블이었다. 우리 집에도, 할머니와 할아버지 댁에도 있었던 바로 그것과 같은 모양. 그래서 사람들에게 낯섦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이러한 고재들은 처음 본 사람은 없지만, 일상에서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이곳의 공간 색을 가장 뚜렷이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옛날 가구들이다. 이런 면은 성수동의 카페 오르에르와 비슷하지만 이곳은 공간 전체를 만졌다기보다는 이러한 고재들이 가장 뚜렷이 보이도록 배경이 되는 천장과 벽을 콘크리트로 미장한 벽으로 마무리했다. 바닥은 조금 투박해보이는 학교 복도 마감을 대나무 발이 가리고 있다. 단순한 배경 때문에 리사르 카페로스터스 안의 가구들은 모두 우리 눈에 뚜렷이 인식되고, 그것들의 조화로 공간을 채운다.


얼마 전까지 엄마 가게에서 쓰다 처분한 것과 같은 책상


오래된 것이 지긋지긋하다가도 멋을 가지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올해 초, 엄마의 가게가 이사를 하면서 버리게 된 낡은 철제 책상이 카페에 와 있었다. 중간중간 녹이 슬고, 서랍을 잠글 수 있는 열쇠는 다 없어지고, 이곳저곳이 찌그러져 있는 책상. 서랍 달려있고 양 옆이 막혀있는 책상은 의자에 앉아서 아빠 다리를 할 수도 없다. 버리지 않으면 도저히 쓰임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책상이 카페로 와서 툭 놓여 있는데, 리사르 카페로스터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면이 되어버렸다. 벽에 아무렇지도 않게 걸린 티셔츠는 없었으면 조금 서운할 뻔했다.


내가 앉게 된 1인 소파


친구와 둘이 만났는데, 둘이 나란히 마주 앉을 테이블이 없었던 것은 조금 재미있는 일이었다. 최근 가 본 카페 중에 혼자서 가기 가장 좋은 카페였다.


창문이 작은 공간에 비해 시원시원하게 뚫려 있어서 빛이 무리 없이 공간 깊숙이 들어왔다. 건물의 지하 1층에 위치해 있지만, 주변 대지의 높이 차로 인해 내부에서 보면 1층 정도로 느껴진다. 창문과 벽의 비율이 1:1로 길게 찢어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창문의 형태만 본다면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의 그것과 비슷하다.


인테리어를 어떤 목적과 컨셉으로 진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단순하고 확고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좁은 면적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공간을 벽으로 분할하지 않고 대신 사방의 면들을 완성도 있게 채워넣었다. 아마도 원래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구들이 익숙하고, 또 낯설다. 가구는 모두 벽에 붙어 있고 그 벽을 이루는 요소로 작용해서, 공간이 동그랗게 느껴지지 않고 면과 면들의 조합으로 느껴진다.




p.s. 리사르 커피로스터스는 원래 카페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로스팅만 해주는 곳으로 시작했다고 읽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커피는 진하고 향이 강했다. 두 잔이나 들이켜고 나왔다.


가구에 비해 미니멀한 커피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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