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가지 와인을 추천함
1년 중 가장 덥고 힘든 계절, 더위와 스트레스를 이기는 제철 식재료가 궁금합니다. 7월이 오면 저의 최애 식재료는 이 시기 가장 맛이 뛰어나면서도 여름 에너지의 원천이자, 흰 살과 내장, 껍데기까지 버릴 데 하나 없고 아낌없이 다 내어주는 민어입니다. 회로 먹기도 하고 건조해 굽거나 튀겨먹기도 하는데, 해산물 중 여름 보양식으로는 민어만 한 것이 없습니다. 요리 방법에 따라, 민어는 레드와인도 화이트와인도 다양하게 매칭하기는 하지만, 에너지 부스터 민어와 함께 불쾌지수를 한방에 날리기 위한 최고의 시작은 단연코 차갑게 칠링 된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스파클링을 시작으로 7월의 여러 날들과 재미있는 인연으로 얽힌 와인들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날은 무더운 여름은 아니었지만, 매우 친밀한 어떤 멀쩡한 일반인 선배가 중년의 나이에 갑자기 연극배우로 데뷔하던 날이었습니다. 그 잔잔한 데뷔도 매우 신선했지만, 그날은 러시아의 문호 안톤체호프를 처음으로 접한 날이었습니다. 작품은 그가 27살 어린 나이에 순식간에 집필을 완성하고, 무대에 올리자마자 대성공을 거두었던, 연극 ‘잉여인간 이바노프’이었습니다. 순식간에 흘러간 상연 시간 동안, 소설과 영화로만 접했던 무너져가는 제정 러시아의 당시 사회상을 등장인물을 통해 구석구석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몰락하는 귀족계급, 상인계급의 부상, 급변하는 계급사회, 여성 신분의 변화, 지식인의 무능함 등 등장인물 하나마다 각각의 세상을 표현하고, 고뇌하는 이바노프는 현재의 자신을, 폐렴으로 죽어가는 이바노프의 부인은 어쩌면 훗날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미리 알려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러시아 문학의 ‘마지막’ 대가라고 불리는 이유는 1904년 그가 사망하고 바로 다음 해 제1차 러시아혁명이 성공하면서 제정 러시아 시대의 문학인의 계보가 중단된 이유도 있겠지만, 작품들의 저력에서 그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천재작가 안톤체호프의 죽음을 소재로 다룬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 “심부름”에는 그가 숨을 거두던 시간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주치의는 샴페인 한 병과 세 개의 잔을 가져오도록 시켰고 안톤체호프의 연인인 올가와 함께 셋이서 마지막 건배를 나눕니다, 안톤체호프는 “샴페인, 마셔본 지 너무 오래됐네”라는 말을 남기며 세상을 떠납니다. BMJ(영국의학저널)에 게시된 어떤 이름 모를 의사(콜린 더글라스)의 논문에는 이 장면을 접하고서야 임종자를 대하는 품위 있는 러시아의 의료 전통에 큰 배움을 받았다라고 기술했습니다. 샴페인은 기쁘고 즐거운 날을 대변하는 와인의 이미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지만, 이 일화는 성스럽고 품위 있는 세상에 대한 존중의 도구로도 샴페인은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안톤체호프의 “샴페인”이라는 제목의 단편에는 브랜드의 실명까지 거론되면서 등장하는 샴페인이 있습니다. 바로 가성비의 끝판왕으로 통하는 클리코 여사의 명품 샴페인 “뵈브 클리코”입니다. 44살 젊은 나이로 요절한 천재작가 안톤체호프의 기일인 7월 15일을 추념하며 그가 분명 사랑했을. 그리고 그의 마지막 와인이었을지도 모르는 “뵈브클리코 브뤼”를 추천합니다. 뵈브클리코는 5월에도 로제 와인으로 소개한 적이 있을 만큼, 기본이 탄탄한 샴페인의 교과서입니다. 샤도네이, 피노누아, 피노뮈니에 품종을 블랜딩 한 ‘표준화’된 샴페인으로 해산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분위기를 좀 바꿔서, 이제 좀 액티브한 얘기를 해볼까요. 매년 7월 영국에서는 마니아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고,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름을 들어 보았을 법한 윔블던 테니스 대회가 열립니다. 전 세계의 테니스 강호들을 모두 모아 2주 동안 올해의 세계 최고를 가리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권위를 가진 테니스 대회입니다. 1877년 7월 9일 처음으로 시작이 되었고, 이제는 매년 6월 하순에 시작하여 7월 초순에 끝납니다. 윔블던 테니스 대회는 “랑송”을 대회 공식 샴페인으로 지정했는데, 랑송 샴페인에는 영국 왕실이 공식 샴페인으로 지정한 이유로 왕실의 문장이 보틀 전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뵈브클리코 브뤼와 같이 샤도네이, 피노누아, 피노뮈니에 품종을 블랜딩 한 랑송 르블랙 리저브, 무더운 여름, 뜨거운 열기가 조금 꺾이는 저녁, 윔블던 대회의 남은 나머지 열기까지 시원하게 날려버리기에 충분합니다.
2022년 윔블던에서도 대회의 시작 때만 하더라도 별다른 이변은 없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큰 대회에서는 언제나 변수가 있고, 또 이변은 항상 신선한 충격과 즐거움을 동반합니다. 2022년 윔블던 대회의 여성 우승자 프랑스의 알리제 코르네는 대회에 참석할 당시 세계 순위 37위로 아무도 우승을 예상하지 않았으나 프로데뷔 16년 만에 처음으로 이변을 일으키며 윔블던의 우승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물론 그녀가 메이저대회들에 수년동안 연속해서 탈락 없이 본선에 진출할 것으로 볼 때 위대한 선수임에 틀림없지만, 영국의 도박사들은 아무도 그녀에게 베팅하지 않았습니다. 응원하거나 우승을 기대하는 관중도 없이 윔블던의 코트에서 알리제 코르네는 결국 트로피를 거머쥐고, “프랑스에는 잘 숙성된 와인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잘 숙성된 와인과도 같은 선수”라는 우승 소감을 밝혔습니다. 프랑스 출신 노장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마디였습니다. 그녀의 소감에 번쩍하고 떠오른 와인이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숙성된 와인은 이렇게 빛을 발할 수도 있지만, 와인의 제조 목적이나 보관의 상태에 따라 그 결과는 예측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연히 20년이 넘은 올드 빈티지 와인을 구하게 되고, 또 우연히 20년을 넘게 보관해 온 와인이 있었습니다. 와인 친구들과 셀러에 보관 중인 올드 빈티지 와인을 마시는 이벤트 날, 걱정반 기대반으로 40년을 보틀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려온 그 와인을 만났습니다. 테이스팅을 해보고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너무도 뛰어나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었던 와인을 접하고는, 4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생존해 준 것에 대한 놀라움과 기쁜, 심지어 감사의 감정이 미묘하게 공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와인은 바로 “잘 숙성된 프랑스 와인” 그 자체였던 샤토베이슈벨 1976년이었습니다. 메독 생쥴리앙지역의 4등급 그랑크뤼 클라세로 1등급 그랑크뤼 클라세를 보유하지는 않았지만 메독에서 가장 저평가된 지역인 생쥴리앙의 사실상 매우 수준 높은 와인입니다. 괜찮은 빈티지의 꽤 오랜 시간 셀러를 지켜온 샤토베이슈벨을 구해보세요. 올해의 잘 숙성된 윔블던 우승자인 바르보라 그레이치코바를 위해 함께 건배를 바칩니다.
매년 7월이 오면, 1967년 7월 8일 생을 마감한 세기의 여배우 비비안리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녀의 기일이 포함된 달임에도 불구하고, 슬픔보다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보여준 그녀의 세상에 대한 긍정적 마인드와 강인함이 먼저 떠오릅니다. 세계 2차 대전의 종전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서 방송되는 순간, 연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 병사와 이름 모를 어떤 여인이 나눈 기쁨의 키스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으로 지금도 남아있듯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비안리와 클라크게이블의 키스 장면은 인류 역사의 가장 아름다운 키스 장면으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남성적 문화의 남부 조지아 땅, 전쟁의 척박한 상황 속에서도 커튼을 뜯어 드레스를 만들어 입으면서, 내일의 일은 내일 생각하겠다는 낙천적 마인드로 세월을 이겨나가고, 그 와중에도 도도함을 잃지 않는, 마치 그녀의 실제 삶인 것처럼 느껴지는 멋진 연기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배경인 조지아에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와이너리가 있는데요, 와이너리 코티지의 카버네프랑을 추천합니다. 남부 조지아의 거친 이미지와 매우 잘 어울리는 강건한 레드와인입니다. 세기의 명작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시청하면서 느긋한 저녁 보내고 싶습니다.
비비안리가 강인함과 긍정의 아이콘임에도 불구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가장 유명한 장면들 중에는 그녀가 코르셋을 입는 장면과 언제나 바닥에 끌리는 엄청난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 장면들을 통해서 여성에게 씌워진 전형적인 굴레와 억압은 쉽게 확인됩니다. 비비안리의 코르셋을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사람이 있는데, 이와 같은 여성에 대한 차별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외치고, 더 나아가 실생활에서 코르셋과 롱드레스를 제거해 버린 놀라운 혁명가, 바로 패션 디자이너 코코샤넬입니다. 출생에서 사망까지 영화와 같은 다이내믹한 삶을 보낸 그녀를 기념하며, 컨셉부터 라벨디자인까지 어쩌면 너무나 그녀를 닮은 와인, 루이 드 그르넬의 루아르 끄레망 샤도네이를 추천합니다.
7월에는 또 재미있는 날이 있습니다. 호불호가 있을 것 같은데, 수학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나름 의미가 있는 원주율의 날입니다. 원주율은 원의 지름에 대한 원둘레의 비율로서 3.14 또는 PI라고들 부르는데, 현재 우리의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과학과 관련이 있는 끝나지 않는 무한의 숫자입니다. 수학과 관련된 와이너리들이 꽤 많이 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원주율과 직접 관련된 와인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스페인 와이너리 보데가스 랑가는 매우 직접적으로 3.14 PI라는 이름의 와인을 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이트데이 와인으로 마케팅해서 판매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와인의 품종인 꼰세혼을 재배하는 빈야드의 면적이 3.14ha라서 이로부터 따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웃나라 이탈리아의 와이너리 로베르토 씨프레소에서도 원주율 와인이 있는데, 피그레코(Pigreco)라는 이름의 100% 산지오베제로 Pigreco는 이태리어로 원주율을 뜻합니다. 수학만큼이나 호불호가 뚜렷한 피그레코는 토스카나의 IGT로 나름 고급와인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알려지지 않은 전통의 와인 강호국인 조지아에는 이름 자체가 파이(π)인 와이너리가 있습니다. 조지아의 와인이 낯설기는 하지만, 7월의 원주율의 날을 기념하며 와이너리 파이의 사페라비를 추천합니다.
7월에 수확하는 햇감자는 그냥 삶거나 쪄서 내어 놓아도 금방 사라질 정도로 제철 식재료로써 이때가 맛이 가장 좋습니다. 앞에서 소개드린 어떤 와인들하고 매칭해도 제철 감자로 잘 구워놓은 감자전은 찰떡궁합입니다. 재미있는 일화나 역사들과 연관된 7월의 와인과 제철 음식들로 무더운 여름, 시원하게 이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