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채희(8)

번영은 칭찬이 아니었다. 대가였다.(2)

by 김수달

아버지의 허리가 조금씩 회복되던 해,
소파수리점을 하게 되었고, 시간이 좀 더 지나서 가구점으로 변했다.
거짓말처럼 일이 들어왔고,
아버지는 다시 서 있었다.
가게는 번영했고,
가계는 숨을 돌렸다.
하지만 번영은 칭찬이 아니었다.
대가였다.
아버지는 허리디스크 후유증과 싸우며
몸을 갈아 넣었고,
엄마는 마음을 갈아 넣었다.

그렇게 내가 태어나고, 방 세 칸짜리 우리 집이 생기고, 집 안에 깨끗하고 따뜻한 욕실, 고깃국에 쌀밥 실컷 먹고, 남 눈치 안보며, 떳떳이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번영은 칭찬이 아니고 대가였다.

아빠는 허리디스크 후유증, 어깨에는 석회가 끼고,
엄마에게도 인생의 3월의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갱년기였다.
그 시절 엄마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였다.
아무 일도 없는데 눈물이 나고,
아무도 잘못한 게 없는데 화가 치밀었단다.
엄마는 자꾸 나에게 화내고, 울고, 짜증 내고,

나의 사춘기와 갱년기가 붙었다.
생활은 나아졌지만,
엄마의 심장은 그때 가장 가난했다.

고등학생 때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나는 사람이 쓰러지는 게 트라우마다.

아침밥 먹고, 등교하려는데, 엄마가 내 앞에서 졸도를 했다. 거품을 물고서,

처음 봤다. 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실제로

말이다.

실제상황 같지 않았다.

나는 119를 불렀고, 엄마와 아빠는 앰뷸런스 타고 응급실로 갔고, 나는 집에서 하염없이 있다가,

아버지 전화하셨다.

"강아지 풀아. 엄마가 너 꼭 학교가래. 안 가면 두고 보지 않을 거란다."

자식 걱정을 했단다.

나는 그날 1교시부터 7교시까지 진짜 계속 울었다. 급식도 안 먹었다.


친구들도 건드리지 않았다.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기억이 또렷하다.


그리고 내가 서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다음 해에 아버지가 대퇴부 골절, 허리디스크

수술, 팔 수술로 한 해에 세 번을 거의 연달아

입원하셨다. 지금도 눈물이 나고, 속상하고, 자다가도 벌떡 깨진다.

아버지 손은 울퉁불퉁하다. 마디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하고 옹이 박힌 것 같이 거칠다.

남자 손은 다 그런 줄 알았다. 아닌 것을 한참 후에 알았다.


성실함의 대가로 아직 팽팽하실 연세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셔서, 가슴이 저려온다.


아버지는 어깨와 허리로 아픔을 견디고,
엄마는 마음으로 아픔을 견뎠다.
두 사람의 늙어감은
그때부터 천천히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우리 집을 일으킨 건 가구점이 아니라,
부모의 몸과 마음이었다는 걸.


작가의 이전글서울, 채희(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