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 joy of man's desiring
폭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가지고 적과 맞서 싸웠던 전대미문의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전쟁 그리고 미술관 음악회>
2차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영국의 전시 내각의 수상으로 취임한 처칠은 1940년 5월 13일 의회와 국민들 앞에서 전쟁을 수행해 나갈 정책과 각오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저들과 싸울 것입니다. 바다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도 저들과 싸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힘과 능력을 총동원하여, 어둡고 개탄스러운 인간의 범죄 목록에서도 유례가 없는 저 괴물과 같은 독재자(히틀러)를 상대로 싸우는 것, 이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처칠의 말처럼 온 유럽이 히틀러의 수중에 떨어지고 홀로 남았을 때, 영국은 모든 힘과 능력을 총동원하여 히틀러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때 영국의 음악인들도 총칼 대신 악기를 들고 일어나 참전하였습니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의 많은 사람들이 공황상태에 빠지고 런던의 민심은 흉흉해졌습니다. 곧 다가올 공습을 피하여 시골에 친족이 있는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시골로 보내거나 가족들과 함께 런던을 떠났습니다. 물자 부족을 예상하여 사재기가 시작되고 빈집을 터는 사람들도 생기고 좀도둑이 기승을 부리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다가올 독일의 공습으로 인한 대량 살상을 피하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던 모든 시설을 폐쇄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문화공간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미술관과 극장과 공연장과 박물관이 문을 닫았습니다. 온 나라의 일상이 헝클어지고 혼란스러워지자 피아니스트 마이러 헤스(Myra Hess)는 혁명적인 생각을 해냅니다. 그것은 전쟁 중에도 음악회를 지속적으로 열어서 런던 시민들을 위로하고 히틀러의 침공 앞에서도 영국민으로서 품위와 일상의 평온을 잃지 말고 담대히 적과 맞서자는 메세지를 영국민들에게 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매주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점심 시간(1시)에 열리는 음악회를 기획했습니다. 하지만 공연장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미술품들을 모두 런던 밖의 안전한 곳으로 옮겨서 비어있는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을 콘서트홀로 사용하면 어떨까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당장 미술관장이었던 케네스 클락(Kenneth Clark)을 찾아가서 의논하자 그는 무척 이를 반겼습니다. 그는 텅빈 국립미술관에서 적당한 방을 찾아서 이를 공연장으로 서둘러 개조하고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한 대 주문해서 설치해 주었습니다. 정부는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이 전시(戰時)음악회를 허가해 주었습니다.
1939년 10월 10일 화요일에 첫 전시(戰時)미술관음악회(Lunch Concert)가 열렸습니다. 마이러 헤스는 대략 40-50명 정도의 그녀의 지인들이 그녀의 뜻을 지원하기 위해서 공연에 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공연 시간이 되자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무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미술관 앞의 트라팔가 광장에 긴 줄이 만들어졌습니다.
첫날은 예상을 뛰어넘는 많은 관객들이 몰린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지 못하고 공연장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앉아서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고 2주후인 1939년 10월 24일, 돌아가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왕비가 이날 음악회에 처음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이 음악회를 찾아서 마이러 헤스의 음악회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음악회는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면서 전쟁의 포화 속에서 평화와 문명을 상징하는 내릴 수 없는 기치(旗幟)가 되고, 음악회가 열리던 국립미술관은 어느덧 폭력과 야만의 전쟁과 맞서 싸우는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대공습>
우려하던 바와 같이 드디어 1940년 9월 7일, 600여대의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364대의 독일 폭격기가 런던을 폭격하기 위해 날아왔습니다. 런던 대공습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에 맞서는 영국 공군기와 독일 공군기의 공중전과 작열하는 대공포화로 런던의 하늘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독일 폭격기들은 런던에 폭탄을 비 오듯 쏟아부었습니다. 런던 부두가 독일 공군의 주요 표적이었지만 민간인 거주 지역에도 폭탄이 떨어져 45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이날은 토요일이라 음악회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런던은 밤낮으로 독일 공군의 공습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국립미술관은 런던의 중심부인 트라팔가 광장에 인접해 있어서 폭격에 맞을 확률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연주회는 계속 열렸습니다. 1940년 10월 15일 화요일 오전 11시, 헤스는 미술관이 독일군의 오전 공습 중 폭격에 맞아서 공연을 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헤스는 연주회를 중지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관객들은 폭격이 지나간 후에도 공연장으로 모여들어 줄을 섰습니다. 헤스와 스텝들은 재빨리 수소문을 하여 남아프리카 하우스 근처의 도서관에 임시 공연장을 마련하여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릴러 쿼테트(Griller String Quartet)와 막스 길버트가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현악5중주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연주회는 다음날부터 다시 미술관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전쟁 중 전시 음악회가 열리던 국립미술관은 아홉 차례나 폭격에 맞았습니다. 어떤 날은 미술관이 폭격에 맞은 후에 폭파되지 않은 1천 파운드의 폭탄이 발견되어 군의 폭발물 처리팀이 옆 방에서 폭탄을 처리하는 동안 연주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연주회가 진행되는 가운데 미술관이 폭격에 맞은 일도 있었습니다. 1940년 10월 23일 수요일, 스트라톤 쿼테트(Stratton String Quartet)가 베토벤 현악4중주를 연주하는 동안 폭탄이 미술관을 직격했습니다. 미술관이 폭발로 진동하며 건물 일부가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관중석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아무도 자리를 뜨지않았습니다. 무대 위의 스트라톤 쿼테트(Stratton String Quartet)는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한 박자도 놓치지 않고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헤스와 그녀의 동료들은 1939년 10월 10일부터 전쟁 기간 내내 6년간 단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공연을 열었습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저녁에도 공연을 했습니다. 6년 반 동안 1698회의 공연이 이어졌고 공연장을 찾은 사람의 수는 82만4천152명이었습니다. 마이러 헤스는 150회 무대에 올라 연주했습니다. 연주회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다가 1946년 4월의 마지막 연주회를 끝으로 중지되었습니다. 전시에 문화적 갈증을 달래주던 이 연주회를 지속시키자는 요청이 잇달았지만 전쟁이 끝나서 런던 밖으로 옮겨졌던 그림들이 돌아오면서 비어 있던 국립미술관은 다시 미술관으로 돌아갔고 공연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국립미술관은 전쟁 중 이곳에서 열렸던 음악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6년 10월 6일을 마이러 헤스의 날로 선포하고 기념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전시미술관음악회 첫날 마지막 순서로 연주하는 마리러 헤스>
<음악의 힘, 위로>
폭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사람들로 하여금 방공호로 달려가 숨지 않고 공연장으로 모여들게 만들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느낄 수 있었던 평화와 위로가 아니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야만과 폭력의 전쟁에 맞서서 지지 않겠다는 음악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간의 유대감이 아니었을까요?
전시 미술관 음악회의 첫날인 1939년 10월 10일, 마이러 헤스는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올라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가장 유명한 칸타타 중 하나인 BWV147 Herz und Mund und Tat und Leben(내 마음과 나의 입술의 말과 나의 행동과 삶으로) 중에서 마지막 곡인 합창곡 Jesus bleibet meine Freude(예수는 영원한 나의 기쁨)을 자신이 피아노 곡으로 편곡한 Jesu, joy of man's desiring을 연주하였습니다.
독일 공군의 폭격기가 폭탄을 쏟아 붓는 가운데 런던 시민들을 위로하던 독일의 작곡가 바흐의 Jesu, joy of man's desiring를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매주 토요일 저녁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