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erloo Bridge
연말이 되면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을 종종 듣게 된다. 그럴 때마다 촉촉하게 감정선을 건드리며 다가오는 그 선율을 타고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다. 무슨 마음의 상처처럼 또는 젊은 날의 아련한 추억처럼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영화 워털루 브리지(Waterloo Bridge). 한국에서는 애수란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안개가 자욱한 밤, 런던의 워털루 브리지 위에 한 대의 지프가 서자 영국군 장교 로이 크로닌 대령(로버트 테일러)이 내린다. 그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1939년 9월 3일 밤, 프랑스 전선으로 부임하기 위해 워털루 역으로 향하던 도중, 젊은 날의 아픈 추억이 어린 워털루 브리지 위에 들른 것이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선 그는 호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마스코트를 꺼내어든다. 한 시도 몸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는 그 추억 어린 마스코트..... 그의 눈앞으로 24년 전의 슬픈 사랑의 추억이 서서히 물결을 이루며 밀려든다.
제1차 대전이 한창인 어느 날 저녁, 워털루 브리지 위를 지나던 젊은 대위 로이 크로닌은 갑작스러운 공습경보에 핸드백을 떨어뜨리고 인파에 밀려 쩔쩔 매고 있는 아가씨를 도와 함께 방공호로 대피한다. 폭격이 시작되고 폭음과 진동이 끝없이 전해오는 방공호 속에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공습이 끝나고 밖으로 나온 두 사람...... 아가씨는 휴가 중의 로이가 다음 날 전선으로 복귀한다는 말을 듣자 ‘행운을 빈다”며 조그마한 마스코트를 쥐어 주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그녀의 이름은 마이러 레스터(비비안 리), 발레단의 무희였다.
하지만 그날 밤,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극장 무대에서 춤을 추던 마이러는 객석에서 자신을 보고 미소 짓는 로이를 발견하고는 놀라고 만다. 그와의 재회로 기쁘고 설레는 마음을 마이러는 억제할 수가 없다. 로이는 무대 뒤로 마이러에게 공연 후 만나자며 쪽지를 전하지만 발레단 단장인 완고한 키로봐 여사에게 발각되어 마이러는 크게 꾸중을 듣고 로이에게 거절의 편지를 쓰게 된다. 하지만 발레단의 단짝 친구 키티의 도움으로 둘은 몰래 만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를 기억하는 분들은 캔들 클럽에서 촛불이 하나씩 둘씩 꺼져갈 때, 서로 사랑하게 된 두 사람이 다가올 이별 앞에서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올드 랭 사인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다음날 전선으로 복귀한 줄 알았던 로이는 귀대 날자가 늦춰져 마이러를 찾아온다. 그의 느닷없는 청혼에 마이러는 기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스케줄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로이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전선으로 떠나고 만다. 마이러는 전쟁터로 떠나는 로이를 전송하러 워털루 역으로 나갔다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돌아오지 못하고 발레단 단장 마담 키로바로부터 해고를 당한다. 실직한 마이러는 직업을 구하려고 애를 써보지만 전시에 여자가 직장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키티에게 빌붙어 살던 마이러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로이의 어머니를 만나러 나갔다가 우연히 들쳐본 신문의 전사자 명단에서 로이 이름을 발견하고 망연자실하고 만다. 상심하여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내던 마이러는 키티가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몸을 팔고 있는 것을 알게 되자 고민에 빠진다. 계속되는 생활고 끝에 병든 키티와 텅 비어 버린 지갑은 결국 마이러를 거리의 여자로 전락하게 한다. 날마다 워털루 역에 나아가 귀국하는 군인들을 상대로 호객 행위를 하는 마이러...... 로이를 잃은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삶의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저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워털루 역에 나갔던 마이러는 귀국하는 군인들 사이에서 꿈에도 그리던 사랑하는 로이를 발견한다. 반가워서 웃으며 달려오는 로이를 보는 마이러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로이는 전장에서 인식표(ID)를 잃어버려 전사자로 파악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 후로 두 사람 간의 연락이 끊어져 로이로서도 마이러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귀국하는 것을 어떻게 알고 마중을 나올 수 있었냐며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로이 앞에서 마이러의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꿈에 그리던, 죽어서나 만날 줄 알았던 연인을 살아서 만난 현실은 거리의 여자로 전락해 버린 처지 앞에, 깨어나고 싶지만 깨지지 않은 악몽처럼 마이러에게 다가온다.
마이러는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으로 잃은 줄 알고 자포자기하여 거리의 여자로 전락한 것을 로이에게 절대로 밝힐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기쁨에 넘치는 로이와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간직한 마이러의 대사가 심금을 울린다.
로이: 행복해?
마이러: 네.
로이: 완벽하게?
마이러: 네.
로이: 까무러치게?
마이러: 네.
로이: 의심 없이?
마이러: 네.
로이: 거리낌 없이?
마이러: 네...
로이: 패배주의는 안돼.
마이러: 네...
로이: 달링. 이따금씩 당신의 눈에 두려움이 보여. 왜 그렇지?
그래, 살기가 힘들었지, 내가 알아. 가난 속에서 그토록 고생을 했으니.
하지만....... 그건 이제 다 끝났잖아. 당신은 이제 안전해. 두려워하지 마.
이제 다시는 그럴 필요 없어. 당신을 사랑해.
마이러: 오, 로이! 당신은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은 너무......
(목이 메는 마이러는 로이의 목을 안고, 키스한다)
로이는 마이러가 그동안 지내온 일들을 짐작하게 되지만 모두 묻어 버리고 마이러와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기 위하여 결혼을 서두른다. 로이는 마이러를 데리고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로는 로이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 마이러는 로이의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혼자 로이의 집을 나선다.
안개 낀 밤의 워털루 브리지, 군용차들이 즐비하게 지나는 가운데 마이러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차량의 헤드라이트 빛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전장에서 돌아온 로이가 돌려준 행운의 마스코트는 다리 위 차가운 보도에 나뒹굴고......
로버트 셔우드(Robert E. Sherwood)의 희곡을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는 1931년 작품의 리메이크이다. 1940년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개봉하여 연인이나 가족을 전장에 보낸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 중 부산에서 개봉된 이래 수차례 재개봉되어 수많은 관객을 울렸다. 1970년대 KBS 명화극장에서도 잊을만하면 한 차례씩 방영하던 영화이다. 할리우드 비극적 러브 스토리의 전형이 된 작품.
“쿠오바디스” “마음의 행로”의 감독으로 유명한 머빈 르로이(Mervyn LeRoy)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앙칼지고 드센 스칼렛 역을 맡았던 비비안 리가 이 영화에서 비극적인 사랑에 우는 마이러의 청초한 아름다움을 잘 살려 내었고 전설적인 미남 배우 로버트 테일러의 중후한 멋이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