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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Nov 03. 2022

내 이름을 불렀다

정글


고등학생 때였어요. 정말이지 교실 입구에만 가도 남자 녀석들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2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정글이었지요. 그때 그 시절 중요 과목도 아니고 보통이라면 관심이 있을 리도 만무한 독일어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그때의 독일어 선생님은 정글 속 동물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계셨어요. 관심이 가는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이름이 각인되고 잘하는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기억이 되겠지만 구석에서 쳐 박혀있는 학생들을, 어느 누구도 괜히 말 걸지 않는 학생들도, 너무 평범해서 눈길 가지 않은 학생들도 이름을 외우고 계셨어요. 여자 선생님이셨지만 학생들이 환호할 만한 젊음이나 아름다움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 제 눈이 높았을 수도 있었겠네요. ^^ 암튼 그 선생님은 첫 시간부터 '누구야' 하고 눈을 맞추며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고는 수업을 진행하셨어요.




어리둥절


네, 어리둥절이 가장 좋은 표현일 것 같습니다. 왜냐면 한 반에 육십 명 가까운 학력고사 세대 끝자락 우리들은 특별난 누구누구를 제외하고 이름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보통은 번호로 불렸고 그 번호가 오늘은 내가 아니길 바랬던 시절이었거든요. 당연히 저도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고 이름이 불렸어요. 그 시절 중요하지 않은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세계사의 경우는 정말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누워 잤어요. 아, 우리 학교가 혹시 수준이 떨어지는 학교였나구요? 인천 명문이라고 불리는 빅 2 중 하나였어요. 비록 뺑뺑이라 제 실력과는 상관이 없었지만요. ^^; 제 이름이 불리는 순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뭐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지만 저도 똑같이 번호로 불리는 평범한 학생 중 하나였으니 내 얼굴을 보며 이름이 불릴 땐 무슨 마법 같기도 했어요. 왜냐면 그 선생님은 우리 학년 아이들을 모두 알고 있었고 이름을 외웠거든요.




이름을 부른다


이름이 불린 저는 독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딱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차마 그 선생님에게 실망을 주기는 싫었던 것 같습니다. 아, 우리 반 아이들이 숙제를 했어요. 아마 다른 친구들도 저와 비슷한 마음이었던 가 봅니다. 정글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름을 부르고서는.

게다가 그 선생님은 여자분이셨지만 우리와 가까이 계셨어요. 무척이나 친절하셨고요. 그 때까지 우리는 정글을 지배하는 것은 사자뿐인 줄 알았었는데. 아 참, 그 사자들은 우리를 막 대했어요. 막대기 주먹 혹은 지나친 말들로. 저는 그런 사자들에게 맞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쫓겨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글에 노래하는 꾀꼬리가 나타나서는 길을 보여주는데 거칠었던 우리 정글 동물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길을 가고 있었어요.




나도 이름을 부른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특히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지난 3년간은 아이들과 속을 나누기 어려운 시간이었어요. 고등부를 주로 맡아 가르치는 저는 얼굴도 모르는 채 학생들과 헤어지기도 했어요. 아마 길가면서 마주쳐도 누군지 모르는 일이 있을 거 같습니다.

저는 그날의 독일어 선생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 선생님은 아마 천재적인 암기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우리 몰래 사진을 찍어서 매일 밤 이름을 얼굴과 맞춰서 외우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선생님 덕분에 저도 학생들을 가르칠 때 사자가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름을 부르고, 내가 필요할 때 나타나려고 하죠. 기다립니다. 되도록 오래 기다립니다.




아이들은 안다. 아주 잘 안다.


아이들은 결국 압니다. 우리는 한 달의 여유를 학부모에게 부여받습니다. 한 달 안에 확실히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다음 달이 약속됩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알아요. 선생님들이 양을 모는 양치기인지 함께 달리며 길을 인도하는 양몰이 개인지.

그래서 우리는 달립니다. 양치기가 되지 말고 양몰이 개가 되자고. 같이 달리면서 양들의 이름을 부르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죠. 아이들의 마음에 "저 선생님 때문에 숙제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이 들도록 말입니다. 매번 잘 되지는 않아요. 우리 마음을 보여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래도 광고로 마음 끌지 말고 진심으로 보여주자고 다짐해 봅니다. 어릴 적 그 독일어 선생님을 다시 떠올리면서요.


선생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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