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물론 그 한순간을 위해서 꽤 오랜 시간이 다져져 왔겠지만.
인생을 재밌게 살고 싶다.
마지막 휴가를 나와 부모님께 선언을 했다. 내년에 미국을 갈 것이라고. 얼굴에는 기쁨도 슬픔도 아닌 걱정이 그득했지만 결코 반대하지는 않으셨다. 그것은 무언의 허락이자 믿음의 표시였다.
미국을 가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 먼저, 멀쩡하게 다니고 있는 대학을 휴학해야 한다. 정말 절실히 공부하여 재수 끝에 들어온 학교다. 적어도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학력을 내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결정이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지금 '연세대학교'를 말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우리 학교가 좋은 학교이기는 하지만 연세대학교도 한국에서나 알아주지 가면 그저 종합대학 -그들이 유일하게 알아들을 단어 University- 에 불과하다. 그런데 학력을 명패 삼아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오만하고 교만한 일이다.결국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은 실력이다.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도 포기해야 한다. 코로나에, 그리고 군 복무하느라 2년 가까이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학길이라니! 괜히 미안한 느낌도 든다.
또, 한국의 사회 시간표를 포기해야 한다. 전형적인 대학교 3학년생이라면 이제 슬슬 인턴을 준비할 때다. 게다가 막 전역한 군필 복학생이라면 이 시기는 소위 '복학 버프'를 받는 시기다.사회가 요구하는 비교적 안정적인 그 길을 포기해야 한다. 벗어난 길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사실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물로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이것이다. 한국에 있었으면 인턴도 하고 취준도 했을 텐데, 미국에 가서 돈만 버리고, 취업은 늦고, 돈을 벌어야 할 시기에 안정적인 벌이가 없으면 어떡하나?
그럼에도 미국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인생을 좀 재밌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참 바르게 살아왔다. 공부 열심히 하고 시키는 일 잘하고. 사회가 원하는 표준 인간처럼 정직하게 살아왔다. 이런 삶은 제법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는 덜하다. 계속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결정적으로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 거다. 지금껏 대학생활을 하면서 일을 벌이기만 했지 제대로 수습하고 끝마친 일이 별로 없다. 아니, 끝마치더라도 곧바로 새로운 일에 착수하느라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 일들은 어찌 보면 내가 원하는 일이라기보다는 (물론 그 속에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하려고 했지만) 사회가 원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커다란 구조 속에서 남들과 비슷하게 스펙을 쌓아가는 전형적인 대학생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입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커리어가 단절됐고, 분명 복학하고 나면 나는 내게 이런 기회 (커리어 단절을 기회라고 볼 수 있다면)를 주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해볼 기회 말이다. 그러니 지금 주어진 이 시기를 잡아야 한다.
그래서 실리콘밸리에 가기로 했습니다.
실리콘밸리를 가는 이유는 크게 딱 2가지다. 하나는 영어 공부를 하고 싶어서, 다른 하나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 다시 말하면, 삶의 공간적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 목표다.
사실 이 목표는 너무 커다랗다. 이루고자 하는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작은 목표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미국 땅을 밟아본 적도 없고 아무것도 겪어본 게 없는 지금, 당장 세부 목표를 세우기란 어려운 일이다. 미국에 가기 전에 할 수 있는 일들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한국에서 세울 수 있는 중간 목표들을 설정하고 세부 목표는 현지에 도착하여 세우기로 하자.
나는 실리콘밸리에서 일해볼 것이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기업을 성장시키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들이 업무를 위해 소통하는 방식과 기업 문화를 배우고 온다는 게 적절할 것같다.더 깊숙이 들어가서 미국인의 평범한 삶도 알고 싶다. 평소에는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떤 이슈에 민감한지. 회사 밖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들의 꿈은 무엇인지.
유명 기업의 CEO나 현직에서첨단의 기술을 활용하여 세계를 진보시키는 사람들을 만나볼 것이다. 내 전공은 미디어지만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분야는 인공지능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연어 처리/추천 시스템이며 딥러닝을 활용한 학습 방법론들에 관심이 많다. 구글링하여 관련 자료들을 검색해볼 때마다 쏟아지는 페이퍼들. 테크 블로그에서 발간하는 아티클들. R&D뿐만 아니라 그 기술들을 현실 세계에 적용하는 빅테크 기업들. 이 모든 것들이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어진다. 기업이 기술로만 발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술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대부분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고? 맞다. 하지만 세계 시장에 비하면 한국은 너무나도 작다.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인 딥러닝은 대부분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나 미국 대학의 연구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최고가 있는 곳에서 가야 한다.
지금은 돈도 없을뿐더러 해야 할 것도 많은 시기다. 20대 중반에 삶을 새롭게 재편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것 같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기차에 몸을 맡기는 게 더 위험하다. 뛰어내린다는 것,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다. 그런데 기왕 부딪쳐야 한다면 좋은 땅에 부딪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실리콘밸리에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