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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Apr 23. 2018

성북, 예술의 길로

[10호] 우리 동네 아트살롱|글 김보라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표석 하나도 없다. 그 곳의 역사적 가치를 아는 이들도 점점 사라져 간다. 그럼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예술가들의 숭고한 향취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보이지 않는 그 곳을 애써 보려고 한다. 시작은 그러하였다.


  겸재 정선, 오원 장승업, 소정 변관식, 소전 손재형, 근원 김용준, 그리고 수화 김환기. 여섯 명의 예술가들은 성북 지역을 사랑하였고 이곳에서 삶과 예술을 꽃피웠으나 그 흔적은 결코 오랜 시간을 감내하지 못했다. 이미 다른 이들의 터전이 되어버린 곳곳을 서성이며 먹먹한 마음을 추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겸재 정선은 수려한 자연을 찾아 화폭에 담아내며 진경시대를 이끌었다. 그는 성북 지역에 거하지는 않았으나 이곳의 경치를 몇 작품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 중 <동소문도>와 <북단송음>은 이번 전시와 도록을 통해 볼 수 있다. 옛 성북동 계곡을 바라보고 그렸다는 또 다른 작품은 여전히 찾아야 할 과제로 남아 있지만, 이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터전이 되는 암시로서 겸재가 품은 이 마을의 탁월한 자연에 의미를 둔다면 이번 전시의 서막으로 충분하다. 겸재가 걸었을 법한 삼선교 부근에 서면, 이미 수 세기가 지났음에도 의연함을 간직한 성북동 산세가 멀리서 다가온다.


  오원 장승업이 성북동에 살았다는 사실은 영운 김용진의 제안으로 장승업의 집터를 함께 찾아 갔다는 산정 서세옥 명예관장의 구술로 확인되며 석제 서병오, 위창 오세창, 영운 김용진, 춘곡 고희동 등이 오원과 친교를 맺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 집은 초가집으로 오원은 문 옆에 있는 작은 방에 머물렀으며, 키가 훤칠하여 흙으로 된 방 벽을 밀면서 잠을 청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장승업 집터에는 1995년 문화체육부에서 세운 표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그 표석은 새로운 집주인으로부터 오래 전 버려졌고 지금은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원은 말년의 행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집터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정 변관식은 현재 성신여대 부근에 ‘돈암산방’이라 불리는 한옥을 지어 살았으나 화실을 넓히고자 아리랑 고개에 양옥집을 지어 이사를 했고 머지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개발의 성황 속에 ‘돈암산방’은 이미 사라졌고 현재 그곳에는 벽돌로 된 건물이 들어서 현대의 모습을 하고 있어 사진으로만 옛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소정이 타계한 아리랑 고개 양옥의 주인은 바뀌었으나 건물만큼은 옛 주소지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확인했으니 그나마 다행스럽다.

  소전 손재형에 관해서는 2013년 성북구립미술관 봄 기획전시에서 그삶과 예술의 의미를 돌아보면서 <승설암도>를 소개한 바 있다. ‘승설암’은 백양당 서점을 경영하던 인곡 배정국의 집으로 소나무와 벽오동나무가 가득하고 깨끗한 물이 흐르며 수십만 권의 책이 담긴 서고가 있는 당대 예술인들의 아지트와 같은 곳이었다고 하니 민족의 멋과 풍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곳은 소전을 비롯하여 토선 함석태, 상허 이태준, 수화 김환기, 심원 조중현, 근원 김용준, 구보 박태원 등이 모여 예술을 논하고 우리의 정신을 고취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현재 승설암 터에는 음식점이 들어서 있고 소전의 작품을 유심히 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이곳의 역사를 알 수 없다.


  성북구립미술관은 2012년 봄 기획전시에 ‘노시산방’과의 인연을 생각하면서 근원과 수화의 성북동 시절 이야기를 담았다. 근원 김용준은 경성중앙고보 시절 당시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로 처음 이사하였고 결혼 직후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왔는데 그 집이 이태준이 당호를 붙여준 ‘노시산방’이다. 근원은 동경미술학교 유학시절 오원 장승업의 그림을 보고 동양의 문화를 더 높게 생각하게 되어 글과 그림으로 그 가치를 피력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수화 김환기는 김향안과 결혼하여 신혼집을 구하던 중 근원이 살았던 ‘노시산방’을 물려받게 된다. 김환기 부부는 그 집을 ‘수향산방’이라 다시 이름 짓고 살았지만 가족들의 불편함 때문에 종로구 원서동의 양옥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시내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머지않아 다시 성북동으로 오게 되고, 수화의 가족은 1960년대 김환기가 홍익대 미대 학장으로 취임할 무렵까지 이 집에서 살게 된다. 현재 ‘노시산방’은 성북동 274-1번지(성북로168) 수월암 부근이며 김환기의 두 번째 집은 성북동 32-1번지(선잠로56)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 옛 번지와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 것일까. 겸재가 그림을 그린 곳, 오원의 집터, 돈암산방, 승설암, 노시산방, 김환기의 두 번째 집터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개발이라는 꽤 근사한 가면에 가려져 그 본디 모습을 잃고 말았다.

  여섯 명의 예술가들이 한국의 미술에 있어 그 정신과 예술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작품과 업적을 정리하고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삶과 작업의 공간을 기억하는 것도 예술가와 분리시킬 수 없는 중요한 일부가 될 것이다. 우리는 개관 이후 성북동 미술문화 탐방을 지속하면서 장소를 통하여 성북의 예술가들에 대한 소통을 시도하였다. 옛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떠한 표석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과 복원·보존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 냈다. 오원이 술 한 잔을 기울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근원이 부인을 만나 사랑의 마음을 싹 틔운 길, 수화가 산골짜기를 지나 시내로 나가던 산책길,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한국의 예술가들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을 함께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예술의 길로 깊어지는 정취 그 자체이며, 잃어버린 우리의 참 모습인 것이다.


  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가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던가. 우리의 현재를 보다 정제되고 순도높은 미적 풍요로 채우기 위해서라도 앞서간 예술가들과 함께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결코 늦지 않았다.


※ 위 글은 2014년 성북구립미술관 개관 5주년 전시 <성북, 예술의 길로>展 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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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는 2009년 자치구 단위로는 전국 최초로 세워진 공립 미술관 성북구립미술관 관장이다. 성북동이 가지고 있는 근현대 미술의 의미를 찾고 널리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으며, 근현대 미술의 메카로서 성북동을 재조명하고 정체성을 이어가기 위한 작가 발굴 사업을 진행하는 등 성북동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문화 성북동을 만들어가는 문화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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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0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7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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