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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Oct 08. 2018

작지만 행복한 집
- 성북동 소행성 이야기

[11호] 주민기고|글 편성준

1

  "우리, 다음엔 단독주택으로 이사 갈까?"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성수동 전세 아파트에서 4년째 살고 있던 아내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응, 그럴까?" 


  대답은 했지만 이사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오죽하면 이혼 다음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행사가 이사라는 말까지 있을까. 사실 오래 전부터 아내는 마당이 있는 집을 갖고 싶어 했고, 그래서 동네에 있는 몇몇 한옥 단독주택을 여러 번 기웃거리다가 괜히 부동산에 들러 집값도 물어보곤 했지만, 우리 형편으로는 언감생심, 안 될 일이었다. 우리가 때마다 쳐다본다고 그 집이 어느날 갑자기 우리한테 올 리도 만무했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집을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수동의 전세가 무서운 추세로 오르고 있었다. 4년 전 여기 올 때는 세상이 다 변해도 이 동네는 변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대림창고에서 윤도현 밴드가 콘서트를 하고, 강남에서 클럽 파티를 하던 젊은이들이 주말이면 여기 와서 창고 파티를 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기획자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결과 성수동은 점점 뜨거워져 이제는 아주 ‘핫한’ 동네가 되어버렸다. 아무튼 돈은 모자라고 마땅한 집도 나타나지 않아 날마다 속이 타들어가던 중, 아내가 기획했던 책인 <미래시민의 조건> 출판기념회 뒷풀이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 중 한 분이 우리가 집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성북동을 추천했다. 그 분은 자기가 오랫동안 거래한 집이라면서 성북동의 '딸기부동산'을 추천해주기까지 하셨다. 


  부동산 이름에 왜 '딸기'가 들어갔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그런 것까지 물을 정도로 나이브한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는 부동산 사장님을 따라 성북동의 좁은 골목길을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흔히 성북동, 하면 높다란 담이 있고 집안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서 있는 저택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다닌 곳은 1960~70년대에 지어진, 아주 좁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동네였다. 마침 다리를 다쳐 걷는 게 불편한 사장님과 이 집 저 집을 순례하던 우리 부부는 너무 지쳐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 우리가 가진 돈이 이렇게 형편없는 액수였던가. 아파트나 연립주택 아니면 다 이런 집밖에 없단 말인가. 영화 [추격자]에서 하정우와 김윤석의 추격씬 일부를 찍었다고 알려진 그 골목길들은 그야말로 사람 둘이 겨우 지나갈 정도였고 골목 사이사이 붙어 있는 집들은 너무 낡고 좁았으며, 옆구리를 기대고 서 있는 옆집 아니면 언제 쓰러질지 모를 듯한 인상마저 풍겼다. 마음에 드는 집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우리 부부는 골목 어귀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장님이 오늘은 그냥 내려가자고 하다가 마지막으로 딱 한 집만 더 보고 가자며 앞장을 섰다. 산을 향해 올라가다가 무슨 담벼락 같은 데를 돌아서 다시 흙길을 내려가는 이상한 위치에 있는 이상한 집이었다.


2

  마침내 언덕 위의 작은 집과 마주쳤다. 낡아서 다 쓰러져 가는 듯 보였지만 홍익사대부중고 바로 옆에 위치한 덕에 다른 사람들의 발걸음이 거의 없는 한적함과 푸르른 숲에 둘러싸인 뒷마당 쪽 입구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학교 땅과 그 집 땅이 겹치는 곳에 심어놓은 나무와 꽃은 덤이었다. 아내의 눈이 빛났다. 이거 괜찮은데? 집 자체보다 뒷마당이 더 탐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는데 순간, 집이야 고쳐서 살면 되지,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둘이 동시에 했던 것 같다. 

  우리는 무엇에 홀린 사람들처럼 무턱대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현금을 빌려 집 계약부터 해버리고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전에 전세 살던 분이 나가기로 해서 계약금만 내고, 잔금도 안 치른 상태에서 두 달 정도 먼저 공사를 할 수 있게 집주인이 양해를 해주었다. 파우저 교수님이 북촌에서 한옥 짓고 살던 이야기를 책으로 쓴 황인범 대목의 소개로 수제자인 임정희 목수님을 만났다. 임 목수님은 대학을 나와 뒤늦게 목수가 하고 싶어 전공을 바꾼 전력이 있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옥상에 올라가 이전에 살던 분이 이리저리 덧댄 지붕을 바라보며 목수님은 말했다.

  "저는 원래 지어져 있던 본체 말고는 다 걷어 낼 겁니다." 

  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바라던 바였다. 


  공사에 앞서 나온 쓰레기를 치우는 데만 사흘이 넘게 걸렸다. 차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모두 사람이 져 날라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서촌에서 좁은 한옥을 전문으로 수리하던 일꾼들이라 그런지, 모두 손끝이 매섭고 일에 능숙했다. 임 목수님은 기존에 있던 남쪽 현관을 서쪽으로 바꿔버렸다. 안방이 있던 곳을 주방으로 바꾸었고 커다란 창문을 냈다. 거실에서 창밖을 보면 멀리 남산타워가 서 있고 가까이는 대학로의 재능교육은 물론 멀리 종로2가의 종로타워가 보였다. 불법으로 잇대어 있던 작은 방들은 모두 걷어내고 수리 과정에서 나온 구들장을 모아 뒷마당에 깔았다. 뒷마당을 가리고 있던 담은 헐고 낮은 계단을 담처럼 쓰기로 했다. 어차피 아랫집 부부 두 분 말고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담을 높게 올릴 필요가 없었다. 단열에 신경을 써달라고 했더니 집안의 벽을 매우 두껍게 조정했다. 

  아주 작은 집이었기에 구조는 최대한 심플하게 만들고 공간을 적절하게 활용하기로 했다. 목수님이 나무로 책장도 다 새로 짜서 넣어주었고 식탁과 싱크대, 스툴까지 집안 사이즈에 꼭 맞게 다시 만들어 주었다. 목수님이 원하는 대로 공사를 하되 꼭 필요한 몇 가지 요구만 들어주기로 했다. 물론 우리가 원한다 해도 목수님이 '안 된다'고 하는 건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저 임 목수님이 원할 때마다 원하는 만큼의 공사비를 은행이든 주변 사람에게든 꾸어서 제 날짜에 척척 가져다 대는 것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우리는 최고의 갑을관계였는지도 모른다. 임 목수님은 정말 신이 나서 일을 했고 우리는 날마다 우리집이 꼴을 갖춰가는 모습에 감탄하고 기뻐했다(공사 결과가 어찌나 마음에 들었는지 임 목수님은 평생 A/S를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정말로 요즘도 가끔 우리집에 와서 수도나 전기 장치를 손봐준다). 두 달간의 공사를 마치고 8월 초에 입주를 했다. 정말 작은 집이지만 층간소음이나 전셋값, 주인집 이딴 거 신경 안 써도 되는 온전한 우리집이었다. 나는 소리쳤다. 여보, 이제 우리 마루에서 쾅쾅 뛰어도 되고 벽에 구멍 뚫어도 돼. 우리집이니까. 



3

  아내가 집 이름을 지어보라고 하길래 ‘성북동 소행성(小幸星)’이라 붙였다. ‘작지만 행복한 별’이란 뜻이다. 정말 너무 작아서 침대도 들일 수 없는 집이었으나 새 집을 갖게 된 두 사람의 행복과 여유만은 넘쳐흘렀다. 에어컨이 없어서 첫 여름은 무척 더웠지만 벽이 두껍고 창문이 튼튼해서 그런지 겨울은 춥지 않게 났다. 그렇게 여름과 가을, 겨울을 나고 드디어 처음으로 봄을 맞아 보았다. 봄은 달랐다. 날마다 새소리에 눈을 뜨면 마당에는 꽃이 지천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꽃향기가 거실을 휘감았고 바람이 불면 뒷마당에서 이어지는 길로 벚꽃들이 비처럼 우수수 흩날렸다. 길고양이가 산 위로 올라오다 우리집 앞에서 멈췄다. 엄마와 새끼로 보이는 커플이었다. 아내는 고양이들에게 '양일이', '양이' 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처음엔 경계를 심하게 하던 고양이들이 먹이 앞에서 긴장을 풀었다. 새끼인 양이가 먹는 동안 언제나 멀찍하게 떨어져서 망을 보다가 뒤늦게 식사를 하는 엄마 양일이의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었다. 두 계절을 넘게 우리집에 와서 사료를 먹던 양일이와 양이는 어느 날부터 종적을 감췄고(길에서 죽었을 수도 있다) 양삼이와 양사를 거쳐 이제 양오라는 고양이가 일 년 넘게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있다. 


  집을 계약하던 날 가서 아내와 함께 한라산 소주 한 잔을 기울였던 가게가 한성대입구역에서 올라오다 보이는 '섭지코지'라는 횟집이었다. 이 집은 그 후로 단골이 되었는데 고소하고 싱싱한 회 말고도 장점이 더 있었으니 바로 합리적인 할인율이었다. 홀에서 먹지 않고 포장을 하면 10퍼센트를 할인해 주는데 거기다가 현금으로 계산을 하면 또 10퍼센트를 할인해 주는 더블할인 시스템이었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지금도 이 집에서 싼 값에 회를 떠다가 집에서 가볍게 한 잔 하곤 한다. 성북동에서 가장 유명한 집은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이는 '쌍다리집'일 것이다. 이 집은 기사식당을 표방하는 것 때문인지 '테이블 당 소주 한 병 이상 금지'라는 규율이 있다. 그리고 사장님들이 기사를 대동해서 나타나는 '성북동 국시집'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휴일 아침이면 스타벅스 옆 골목의 '할매청국장'에 가서 청국장과 순두부찌개를 먹었고, 가끔은 '나폴레옹과자점'에 가서 사라다빵을 사다 먹기도 했다. 한성대 쪽 먹자골목에 있는 '꼬꼬통닭'에 가서 맥주를 마시다 보면 돈이 없는 대학생들이 천원 단위까지 'n분의 1'을 하는 광경도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한성대 학생들 말고도 대학로를 넘어 온 연극배우나 연출가들이 늘 그득하다. 


4

  그래도 우리 부부에게 가장 애틋한 단골은 '디미방'이라는 작은 식당과 '성북동 콩집'이라는 커피가게다. 특히 디미방은 이사 초기부터 단골 삼았던 집인데 사모님의 음식솜씨가 깔끔하고 훌륭했다. 그리고 바깥 사장님은 늦게 와서 설거지와 뒷정리를 주로 하시는데 지금도 문학과 문화를 매우 가까이 하시는 낭만적인 신사였다. 우리는 허구한 날 디미방에 가서 저녁을 먹었고 틈만 나면 사장 내외분들과 수다를 떨었다. 두 분은 늘 진실하고 포용력 있는 자세로 손님들을 대했기에 따르는 사람들과 단골이 많았다. 오죽하면 동네의 딴 장소로 가게를 옮기는 날엔 성북동의 문화 인사들이 다 모여 술을 마시고 국악과 클래식 공연 등을 펼치며 아쉬움을 표했을까. 하지만 우리 부부가 가장 감복했던 것은 디미방의 휴일이 월요일에서 토요일로 바뀌게 된 사연이었다. 두 분 사이에 큰 딸이 있었는데 우리가 한참 가게를 오갈 때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해서 인사도 나누고 그랬다. 그런데 결혼식을 치루고 나니 하객으로 왔던 많은 분들에게 고마움을 갚는 길은 토요일마다 직접 결혼식을 찾아가는 길뿐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말이 그렇지 토요일에 영업하던 가게를 갑자기 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감행한 분들이다.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내는 카페를 운영하던 한 페이스북 친구분께 탁자와 파라솔을 저렴하게 구입했다. 현관 앞에 단지 파라솔 한 개 편 것뿐인데도 느낌이 너무 달랐다. 우리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파티를 열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가 평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은 '사람들이 놀러 오는 집'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티라고 대단한 술이나 음식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옥상이 있었고 아내가 간단하게 준비하는 '매일매일 밥상'의 요리가 있었다. 가끔은 나나 손님들이 별빛 아래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성북동은 대학로 바로 옆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배우나 가수들이 많이 살았다. 우리도 알음알음 배우들을 통해서 새로운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얼마 전 백상예술대상에서 드라마 부문 조연상을 수상한 박호산 배우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호산은 나와의 인연으로 광고 프로덕션인 우리 회사에서 제작하는 '화재안전' 공익광고에도 출연을 해 주었다. 너무나 성실하게 열연을 해주어서 우리가 고마워 할 일이었지만 호산은 오히려 그 일부터 시작해 자신의 운이 활짝 피고 있다며 나에게 비싼 술과 안주를 샀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

  예전에 프리미엄급 아파트 광고 중에 이런 카피가 있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높다란 담과 금빛 게이트가 버티고 있는 아파트 전경 위에 흐르던 메시지라 당시엔 '천민자본주의를 찬양하는 거지 같은 카피'라고 욕을 많이 먹었다. 그러나 성북동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는 그 말이 어느 정도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자동차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는 소시민이다. 그러나 성북동에 사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것은 여기 한용운 선생이 살았던 심우장이나 최순우 옛집 같은 문화재가 있어서가 아니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가 유명해서도 아니다. 길에서 마주치는 이웃들끼리 편안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냄새나는 동네라서 그렇다. 새로 생긴 가게가 있으면 금방 달려가 친해지고 누구나 동네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묵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아내와 함께 옥상에 올라갔다. 밤에 비가 오려고 그러는지 바람이 많이 불고 구름도 몰려왔다. 멀리 보이는 빌딩 안에 불이 하나 둘씩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아파트를 떠나 이렇게 전망이 좋은 집에 살게 된 건 행운이었다. 실은 뒤늦게 아내와 만나 함께 살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잘 몰라서 그렇지 행운은 우리 삶 도처에 흩어져 있다. 이 년 전에 성북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도 나에겐 중요한 행운 중 하나였다. 늦게라도 그걸 알아채고 지금 누리며 사는 나는,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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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준은 카피라이터다. 어렸을 때는 공부를, 커서는 일을 잘 못했다. 그래서 국내의 좋은 광고대행사를 전전하면서도 변변한 히트 카피가 없다. 몇 년 전 '커피가 착해서 커피에 반하다' 같은 슬로건을 썼고 최근 화재안전 공익광고 '영화 예고편' 편을 만들었다. 

홍익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MBC애드컴, TBWA/Korea 등의 광고대행사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빡세게이삼일'이라는 광고프로덕션에서 기획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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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1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8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8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8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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