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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Oct 12. 2018

돈암초등학교 33회 졸업생들의
그때 그 시절

[11호] 주민인터뷰

김기민 (성북동천 총무) | 취재 현장지원 및 여는글/닫는글 작성, 초고 감수

박진하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편집위원) | 인터뷰어(취재), 최종감수

차정미 (동 잡지 편집위원 겸 사업운영담당자) | 녹취기록

최나현 (동 잡지 교정/교열 담당자) | 편집·재구성



  하루가 다르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금 이 순간은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치부되고 맙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지나간 일상과 그 안의 풍경을 끄집어내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가치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네의 옛 모습을 추억하고 회고하는데 필요한 재료로서는 충분히 의미 있지 않을까요? 이번 호의 주민 인터뷰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척박한 시기를 지나 60~70년대 산업화 시대, 정치·경제적 격동의 시절을 살아낸 이 시대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기억하는 삼선교와 동소문동 일대, 성북동 초입의 모습을 돈암초등학교 33회 졸업생인 계세언, 김종섭, 우해정 님의 기억을 통해 반추해봅니다.



박진하(이하 )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박진하입니다주민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계세언(이하 ‘계’) : 이름은 계세언이고, 돈암초등학교 졸업생입니다. 요리사입니다. 동소문동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한진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김종섭(이하 ‘김’) : 같은 학교 졸업했고, 성북동에 살았습니다.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종섭입니다.


우해정(이하 ‘우’) : 우해정입니다. 삼선동에 살았고, 돈암초등학교 졸업생입니다.


박 : 돈암초등학교가 1930년대 일본이 도시계획하면서 만들었던 학교로 알고 있어요. 요즘 일산처럼 계획된 신도시를 보면 무엇보다 중요한 게 교육이잖아요.  그 당시 일본에 의해서였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 신도시로 개발된 지역 첫 번째가 돈암지구였거든요. 돈암초는 신도시 개발계획으로 세워진 학교 1호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1939년도에 돈암초 설립이 계획됐고, 실제 실행된 것은 1944년도예요. 역사가 깊은 학교입니다.  


계 : 우리도 몰랐던 사실이네요.


박 동창생 분들이 학교를 다녔던 1970년도 이 마을의 모습은 어땠나요돈암초등학교 학생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어떠한 분위기에서 살아왔나 궁금합니다.


우 : 한신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이 발전된 부분도 있겠지만 우리의 추억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느낌이에요. 저는 이 동네는 안 살고 삼선교 살았지만 이쪽에 친척분이 사셨어요. 정말 좁은, 쪽방길이라고 해야 하나. 돈암동에도 그런 골목길이 많았는데 모두 없어졌어요. 좁고 계단 많은 그런 길들이...


계 : 성북동 일부가 그런 길로 남아있지. 


우 : 종섭이가 정말 돈암동의 산 증인이죠. 어렸을 때부터, 결혼해서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으니까. 부모님도 여기 살고 계시고.


김 : 여기 변하는 거 다 봐왔죠. 이 동네 살던 친구들은 어릴 때 산동네 살았던 게 추억인데, 사실 나는 아래 살다보니까 보고 기억하는 게 조금은 다른 것 같아요. 가끔가다 올라가보긴 하는데 낯설어서 금방 내려오고. 추억이 많이 있는 곳이란 얘기만 들었지 구석구석 가보진 못했어요. 


박 아까 이야기를 들었는데, 77년도에 졸업하셨다고 하셨어요그럼 몇 회 졸업생이지요?


우 : 33회요. 제 언니가 소띠인데 베이비붐 세대예요. 그때만 해도 한 학년에 18반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우리 때부터는 한 학년에 14반으로 줄었어요. 또 1~2학년 때는 한 반에 오전반, 오후반 나눠서 갔어요. 


계 : 교실이 부족하다 보니까.


박 한 반에 인원은 몇 명이었나요

     

계 : 한 반당 70~80명, 한 반에 83명까지 있었어요. 한 학년당 14반씩 있었으니까 전체 학생 수가 육천 오백 명, 육천 육백 명 정도 되었지요.


우 : 우리 부모님 세대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해서 아들 낳기 위해 줄줄이 낳았어요. 

     

계 : 우리 때는 집집마다 아이들이 네 다섯 명씩은 있었어요. 제가 사남매였거든요.


김 : 그치. 나도 오남매였으니까.


박 그때 주변에 돈암초등학교 말고 무슨 학교가 있었나요


계 : 삼선초, 성북초, 정덕초, 숭덕초. 이렇게 있었죠. 


김 : 사립학교는 홍익초등학교. 지금은 없어졌죠. 예전에 홍익중학교 안에 있었어요.


박 돈암초등학교 다니시던 분들의 거주 지역은 대개 어디였나요그 당시 학교 가는 길을 그려본다면

     

김 : 저는 삼선교, 성북동 쪽. 지금으로 치면 한성대 전철역 부근에 살았어요. 삼선중학교 담을 끼고 그 길 따라 걸어 다녔죠. 


김 : 어릴 때는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멀게 느껴졌어요. 집에서 나와서 삼선중학교 담벼락이 상당히 높았었는데, 그 길 따라 쭉 가다보면 거리가 왜 그렇게 멀었는지 한 번은 가다가 육성회비를 잊어버린 적도 있어요. 부모님께 엄청 혼났지요. 그때 당시엔 큰돈이라서.


우 : 칠칠맞았다, 그런 걸 잃어버리게. (웃음) 


박 그때면 삼선교가 있었겠네요?


김 : 그렇죠. 삼선교가 지금 전철역 사거리에 있었어요. 성북천 복개되기 이전이니까.


박 그 일대는 풍경이 어땠나요?


김 : 그때 당시엔 대부분 한옥집이고, 종종 2층 양옥집 같은 게 있었고. 도시락은 신문지나 보자기에 싸서 다녔죠. 가다가 김치물 흘리고 그랬어요. 좀 산다는 집 애들은 가방 말고 따로 보온도시락 갖고 다녔는데, 그 애들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반찬도 보면 겨란후라이, 소시지 싸 온 아이들은 집이 웬만큼 잘 사는 아이들이였어요.


우 : 집에서 길 따라 삼선시장(돈암시장)까지 나오면 동도극장 뒤쪽에, 지금은 복개해서 없어졌다가 다시 복원해놨잖아요. 그 당시엔 하천이 더 넓었어요. 어린 눈엔 많이 커보였던 것 같기도 해요. 동도극장이 학교 가는 길목에 있는데 그 뒤편에서 물가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고.


박 : 동도극장이 어디 있었죠?


계 : 여기(디미방) 맞은편이라고 보시면 돼요.


김 : 지금 우리은행 있는 자리예요.


우 : 맞아요. 그 뒤쪽으로 다녔어요. 가는 길이 머니까 엄마한테 10원만 달라고 해서 아이스케키 사먹으며 가고 그랬죠.


박 계 셰프 님은 위쪽에 사셨다고 하셨잖아요기록을 보니까 채마밭도 있고드문드문 민가도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고어렵게 사신 분들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계 : 그때는 무허가 주택이 대다수였고요, 그 중 일부는 허가를 받아서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죠.


박 : 그게 지금 한진아파트 자리인거죠?


계 : 일명 616번지 606번지 산동네라고 불렀던 동네예요. 지금은 한신, 한진아파트가 됐죠.


박 : 거기서 학교 가는 과정을 말씀해주시겠어요?


계 : 거긴 산동네다보니까 돈암초등학교 정문에서 나오면 거기서부터 오른쪽 방향이 언덕으로 올라가는 큰 길이 세 개가 있어요. 정문에서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는 길하고, 거기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인수천이라고 하는 목욕탕이 있었는데 그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었고. 거기서 150미터 정도 더 올라가면 교회 올라가는 길이 있어요. 저희 집 가는 길은 인수천 따라 올라가는 오르막길이었죠. 


산동네 중간쯤에 있었는데 거기서 좀 더 올라가면 지금의 북악스카이웨이. 넓은 마당이라고 불렸던 큰 공터도 있었고요. 지금은 구민회관 쪽, 체육기구 설치되어 있는 곳이에요. 거기 우물도 있었어요. 펌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물이 안 나오는 집은 거기서 물을 퍼서 집까지 가져가곤 했어요. 그래서 그 물을 한 통에 얼마씩 팔기도 했어요.


박 혹시 도시락 반찬은 뭘 싸갔었나요?


우 : 소시지, 마늘종, 겨란, 멸치볶음... 멸치볶음도 당시엔 귀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김 : 이유식을 먹고 난 빈 병에는 김치를 싸고, 도시락에 밥 넣고 겨란으로 덮었어요. 겨란프라이에 덮은 밥에다가 김치. 그게 제일 흔한 도시락이었지요. 조금 잘 사는 아이들은 겨란말이, 소시지를 겨란에 씌운 거를 싸왔어요.


우 : 당시엔 보리 혼식을 권장해서 꼭 밥 검사를 했어요.


김 : 맞아요. 보리가 일정 정도 안 보이면 손바닥을 맞았어요. 쌀밥만 싸오면 혼났어요. 그래서 어떤 애들은 보리 많은 애들한테 얻어서 겉에만 올려놓고 그랬어요. 


김기민(이하 ‘민’) : 격세지감을 느끼네요. 요즘에는 쌀 소비 촉진 운동하는데...


김 : 그나마도 못 싸온 아이들에게는 빵과 우유를 나눠줬어요.


우 : 그때는 신청한 사람은 다 나눠준 것 같은데? 옛날에는 영양이 부실하니까 삼각 봉투에 든 우유를 전체 학생들한테 나눠준 것 같아요. 빵도 소보로빵. 크진 않고. 


박 여기 주변 상황이 그때랑 지금이랑 현격히 달라진 것에 대해서 많이 말씀을 하셨어요혹시 그 외에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그때에 비해 많이 바뀌어서 아쉽다이런 게 있다면?


우 : 우리 때 선생님의 위상은 최고였어요. 선생님 그림자도 안 밟는 시대였어요. 육성회비를 못 내는 집들이 많다 보니까 늘 학부모들은 선생님한테 허리를 굽혀야 하는 상황이었죠. 요즘에는 엄마가 더 당당한 시대잖아요. 그 당시엔 그런 건 엄두도 못내는 시대였죠. 


민 : 요즘에는 교권과 학습권이 대등해진 시대이죠.


계 : 역전된 게 아니고요? (웃음)

    성북천 따라서 엄청나게 긴, 아주 낡은 아파트가 두 채 있었어요. 돈암시장 쪽에 한 채, 파출소 쪽에 한 채. 개천 위에 집을 지어놓은 거예요. 


김 : 삼익아파트라고. 


민 : 그게 예전 성북천 복원하기 전에 저층은 상가이고 그 위엔 아파트인 거군요. 종로 낙원상가 비슷하게...


계 : 그렇죠. 그게 바뀌고 돈암시장 일부가 아파트(동일하이빌)로 바뀌고.


김 : 그 유명한 나폴레옹 제과점이 거기 있었어요. 복개천 맨 끝자락에.


민 : 그때도 나폴레옹이 그렇게 위세가 당당했나요?


계 : 그렇죠. 최고였죠. 가장 많이 변한 건 산동네, 지금 한신아파트 지역이에요. 그때는 판자촌까지는 아니지만 무허가 건물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는데 재개발로 인해서 아파트로 바뀌었지요.


박 : <놀이의 천국>이라는 책을 보니까 삼선교 다리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그 밑으로 아이들이 성북천을 따라서 놀았다고 해요.


계 : 가장 많이 놀던 곳 돈암동 성당 아까 말씀드린 아파트가 끝나는 시점이에요. 거기에 빨래터 자리가 있었어요. 거기는 개천이랑 다르게 맑은 물이 나와요. 초등학교때는 키가 작아서 반바지 입고 들어가면 무릎에서 엉덩이까지 물에 닿았어요. 그 물에서 놀았어요. 엄마들 빨래하면 깨끗한 곳에서 씻고 오고 그랬죠. 배 같은 것도 만들어서 띄워 놀기도 하고.


우 : 깨끗했어? 나는 동도극장 뒤쪽 개천 물이 더러웠다고 생각했는데. 


김 : 깨끗한 건 아니었는데, 남자 아이들은 위생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 


계 : 그랬나? 친구들이랑 노는 것만 생각했지.


박 셰프 님은 그럼 방과 후의 놀이방식이나 특이점이 있다면?


계 : 동네 근처에서 놀기도 하지만 북악스카이웨이에 올라갔어요. 공간도 넓고 뛰어다니기 좋아요. 잔나무 꺾어 칼싸움도 하고, 새총모양 나무 꺾어다 갖고 놀고. 여름엔 수풀이 우거지잖아요. 나무 이용해서 움막 같은 걸 지어서 놀고. 그렇게 삼삼오오 짝지어서 놀러 다니는 거예요. 아리랑고개에서 팔각정까지 3.5킬로미터 정도 돼요. 

  겨울철엔 눈이 참 자주 많이 왔는데, 대나무로 스키를 만들어서 탔어요. 대나무를 꺾어서 앞을 불로 지져서 구부려요. 그렇게 만든 스키를 하나씩 갖고 팔각정까지 올라가서 스키를 타고 내려와요. 아리랑고개까지 내려오면 끝나는데, 힘들어서 다시 못 올라가요.


박 : 그때 길이 있었어요?


계 : 그럼요. 북악스카이웨이가 그때도 있었죠. 팔각정에서 아리랑고개 그 중간에 곰의 집이라는 풀장도 있었어요. 


민 : 아, 곰의 집이 풀장이었어요?


김 : 네, 곰의 집이 한 때는 레스토랑으로 유명했죠. 지금도 있지만, 그때는 정치인들의 비밀스런 회의장소였어요. 김종필 씨가 많이 이용했던 곳이에요.


계 : 아리랑고개에서 쭉 내려오면 돈암시장이 나오고, 거기 있는 친구의 어머니들 가게가 있었는데 시장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면서 음식 얻어먹고. 


민 : 돈암시장도 제법 역사가 기네요.


계 : 역사가 길죠. 53년도인가부터 있었다고 하니까.


우 : 삼선시장보다도 훨씬 컸어요.


계 : 그때는 돈암시장 아파트 3층에 결혼식장이 있었어요. 결혼식을 하면 어린애들이 기웃거려요. 하객들에게 답례품으로 모찌떡을 많이 줬는데 하객들 나갈 때쯤 가면, 모찌떡 하나 얻어먹을 수 있었죠. 그게 얼마나 기뻤는지. 


김 : 그때는 피로연이 음식이 아니고 대부분이 모찌떡을 줬어요. 색색 깔로 된 모찌떡, 그게 그렇게 맛있었는데.


박 성북천이 복개되기 이전의 모습을 보신 거죠그와 관련된 추억 좀 들려주세요.


김 : 제가 살던 집이 지금 한성대입구역 사거리 농협 있는 자리여서 중학교 갈 때마다 개천길 따라 다녔는데, 그때 당시는 복개 전이었어요. 지금은 작아 보이는데 그때는 개천 폭이 크게 느껴졌어요. 


계 : 그때는 성북천의 위치가 지금이랑은 달랐어요. 성북천 복개 이전에는 개천 위쪽으로 집들이 있었어요. 다리(버팀목)를 일부 지탱해가지고 그 위에다가 집을 지었죠. 성북동 올라가는 도로 있잖아요. 그때는 왕복 2차로였어요. 그 길 일부에 집들이 있었던 거죠. 그 뒤편으로 성북천이 흘렀던 거고요. 학생들은 성북천을 사이에 두고 한 쪽은 도로(차도), 길가 인도로 다니기도 했지만 건너편에도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어서 양쪽으로 다녔어요. 


김 : 내가 알기로는 지금 한성대 전철역에서 성북동 올라가는 그 길은 개천길로 알고 있는데?


계 : 아냐. 개천가 집들 뒤편으로, 그러니까 집을 지지하는 버팀목 아래로 개천이 있었어.


민 : 지금 청계천 복원한 구간 한 곳에, 서울문화재단 청사 위치한 쪽 보면 옛날에 이런 집이 있었다고 해서 남겨놓은, 천변에 기둥 세워놓고 그 위에 지은 판잣집들이 있는데, 그게 청계천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성북천에도 있었다는 거네요?


계 : 그렇죠. 그런 집들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었어요. 그때는 유일하게 버스 한 대가 다녔었는데, 풍양운수 85번만 성북동을 지나갔어요.


민 : 왕복 2차선 도로면 버스가 다닐 수 있었겠네요. 길가에 파출소는 그때도 그 자리에 있어요. 큰 나무도 그대로 있었고요. 


김 : 그게 이승만 대통령이 식수한 거예요. 


박 삼선교 교각 관련해서는 지금은 전혀 흔적이 안 남아 있잖아요


김 : 지금 그 성터가 남아 있잖아요. 혜화문 있는 곳. 저희 아버님이 이 동네 오신지가 60년 가까이 되었는데 예전에는 이 일대가 전부 목화밭이데요. 마차꾼이 가다가 해가지면 머물고 하룻밤 쉬는 곳이었대요. 


계 : 마차하고, 그때는 전차였겠지.


박 학교 건물이 세 채였다고 하셨는데.


계 : 본관, 깡통교실, 별관. 깡통교실, 별관은 주로 1~2학년. 특히 별관에선 오전, 오후반 자리고요, 본관은 3학년부터 6학년 교실이었어요. 


우 : 깡통교실은 2층 건물로 모양이 둥글고 양철지붕으로 되어있어서 깡통처럼 보여서 그렇게 불렀어요.


계 : 그리고 본관 바로 뒤에 방공대피소가 있었고 담벼락 근처에 가면 굴이 있었어요. 그때는 민방위훈련이 아니라 방공훈련이라고 받았어요. 


김 : 어떤 집은 방공호집이라고 지칭했는데 아마 그런 집들은 일제강점기 때 있었던 굴 같아요. 


박 소풍은 주로 어디로 갔나요?


계 : 가장 가까운 데는 정릉. 그리고 창경궁, 그때 이름으로는 창경원도 갔고요.


우 : 저학년 때는 창경원(창경궁)을 걸어서 갔어요. 버스 그런 거 안 타고.


민 : 지금이야 그리 먼 거리가 아닐 것 같은데, 어렸을 땐 꽤 먼 거리 아니었나요?


계 : 멀어도 소풍가는 길이니까 좋았죠.


우 : 짝꿍을 정해서 반별로 줄 서서 걸어 다녔어요. 정릉도 걸어가고. 


민 : 혹시 최근에 가보셨나요? 그때 모습이랑 최근 모습이랑 달라진 건 없나요?


계 : 거기는 별로 손대지 않은 것 같아요. 옛날 모습 그대로.


계 : 공식적으로 다닐 때는 정문으로 들어가요. 근데 스카이웨이 통해서 담벼락이 있어요. 벽돌 담벼락이 있었는데 그걸 넘어 다녔어요. 담벼락 넘자마자 우리가 이야기하는 선녀탕, 그러니까 약수터가 꽤 규모가 컸어요. 

   지금은 없어진 것 같아요. 그 당시엔 어른들이 웃통 벗고 등목도 하고 그랬어요. 들어갈 수도 있을 만큼 규모가 꽤 컸고 탕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두 세군데 있어서 샘물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거기서 식수로 쓰기도 하고, 샤워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얼마 전에 가보니 흔적도 없더라고요. 


박 그때는 소풍갈 때 준비물이 뭐가 있었나요?

     

김 : 김밥, 병으로 된 환타, 과일. 


계 : 바나나가 최고였지. 


우 : 바나나랑 귤 정도였는데, 그게 그렇게 싸지 않아서 가끔 먹는 거. 바나나는 특히 아프거나 무슨 특별한 일 있을 때, 뭔가 포상을 받을만한 일을 했을 때 먹었죠.


김 : 보통 김밥이었고, 김밥 외에 특별히 생각나는 건 없네요. 


박 그 시절에는 학교 선생님들한테 별명을 많이 붙였는데혹시 선생님 별명 중에 기억나는 게 있다면?


우 : 똥싼바지. 외모가 옷이 좀 맘에 안 들었던 거죠. 옷이 허름할 때잖아요.


박 : 선생님이 많이 불쾌해 하셨겠네요.


우 : 그때는 선생님들이 징벌을 할 때 좀 무식하게 했어요. 저는 겪어보진 않았는데 체벌 중에 걸레물기도 있었고, 화장실 청소도 많이 시켰어요. 손 체벌도 굉장히 많았고요.


계 : 당시는 체벌이 좀 일반적이었는데. 물론 화가 많이 난 경우였겠지만, 걸상으로 때리는 분도 있었어요. 


우 : 출석부로 때리는 건 다반사야. 뭐 잘못하면 출석부로 맞고 그랬죠.


김 : 그때 당시에는 선생님이 때리면 그냥 잘못했으니까 맞았구나 생각했죠.


민 : 출석부로 맞는 거야 저희 때도 있었는데, 걸상으로 때리는 건 좀 너무 심한 것 같은데요?


계 : 겨울에는 난로 위에 한 반의 도시락을 다 쌓아놓는데. 밑에 있는 건 타잖아요? 그럼 밑에 있는 걸 꺼내서 위에 올려야 되거든요. 학생들 사이에도 권력이 있어서, 반에서 인기 있는 애들은 중간 자리에 도시락을 넣을 수 있었죠. 그런데 그런 것 때문에 체벌을 당하기도 했어요. 


박 학교 생활하면서 있었던 재미난 일 하나씩 이야기 해주세요


우 : 초등학교 때는 공부 외에 그림 그린다거나 노래를 많이 가르쳐 준 선생님이 있었어요. 중학교 때는 사교육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그림 그리는 날, 영어단어 시험, 수학 시험 보는 날 같은 행사들이 많았어요, 포스터가 많았고. 그런 것들이 자기 재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지요. 


박 : 혹시 크게 싸워본 기억도 있나요?


계 : 그때는 맞아본 기억만 있죠. (웃음)


김 : 그때는 친구랑 다툼이 있으면 ‘너 나와라’ 해서 학교 뒤편으로 갔었어요. 정정당당히 해보자, 뭐 이렇게. 서로 결투하자고 해가지고 애들이 보는 앞에서 싸움을 했는데, 시작한지 10초 만에, 불리할거 같아서 바로 그만하자고 했죠. (웃음)


박 : 다른 재미난 일은 없었나요?


김 : 재미난 건 그때는 담임 선생님이 방과 후에 과외를 했어요. 합법적으로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함께 과외 했던 여학생을 최근에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신기한 것이 지금 봐도 그때 제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더라고요. 


박 : 셰프 님은 어땠나요?


계 : 초등학교 2학년 때 동급생 친구와 좀 불량스러운 형이 있었어요. 가방 매고 등교하는데 그 형이 놀러가자고 하는 거예요. 가방은 뒷산에 풀로 덮어두고 가면 된다고 해서 청계천을 놀러갔죠. 신나게 놀고 와 보니 가방이 없어진 거예요. 그걸 어디서 찾겠어요. 결국 못 찾았죠. 어쩔 수 없이 집에 와서 부모님께 자초지종 말씀드리고 엄청 혼났어요. 6년 동안 지각하고 빠진 날도 없는데 그것 때문에 개근상을 못 받은 기억이 나네요.


박 : 우 선생님은 학교 다닐 때 남는 기억이 있나요?

우 : 저는 학교 끝나면 집이 머니까 곧바로 집으로 갔어요. 집 앞에 동네 공터에서 애들이 모여서 놀았어요. 그때는 차가 많이 안 다녔거든요.


민 세 분은 동창회 때 만나신 건가요아님 학창시절부터 쭉 알고 지내신 건가요


우 : 몰랐어요. 기억도 안나.


김 : 졸업하고 나서, 최근에 동창회에서 다시 만났죠.


우 : 다시 만난 지 10년 넘었어요.


민 : 동창회 나가시면 보통 어느 정도 규모로 모이나요?


김 : 학교마다 좀 차이는 있는데, 돈암초등학교는 인원수가 꽤 많은 편이에요.


우 : 돈암초등학교 동문회에서 운동회하고, 연말에 송년회도 하고 산악회, 축구회, 볼링모임, 낚시 등 소모임들이 많아요. 그리고 졸업 기수별로 많이 모여서 총동문회 하면 지원도 많이 해주고요. 5월 19일이 운동회인데 이번에는 33회 저희 기수가 주관해요. 기수별로 돌아가면서 준비하거든요. 그럼 선배님들이 물품협찬, 현금협찬, 이런 협찬도 많이 해주시고요. 


박 마지막으로 돈암초등학교 다닐 때그 시절을 행복지수를 점수로 매겨본다면 10점 만점에 몇 점일까요?


우 : 학교를 좀 멀리 다녀서 힘들 긴 했지만 8점 이상은 되는 것 같아요. 아쉬운 건 다양하게 친구를 잘 못 사귀었어요. 제 주변 친구들은 삼선초등학교 다녔거든요. 아버지가 삼선초보다 돈암초가 더 좋은 학교라고 해서 다녔어요. 애들 걸음으로는 좀 멀어서 부담스럽다 보니까 학교 친구들이랑 잘 못 놀았던 거죠.


김 : 저는 8점. 어렵지도 않고, 뭐 그렇다고 아주 풍요로웠던 것도 아니고 원만하게 다녔으니까요. 아쉬운 점이라고 하면 초등학교 때 생활이 거의 기억이 안 난다는 거예요.


계 : 재밌게 놀았던 거 생각해 보면 9.5점 되는 것 같아요. 초등학교 생활 돌이켜보면 대체로 좋았던 것 같아요. 집에서 잘 먹여줬고, 친구들과 재밌게 잘 놀았고, 학교도 큰 사고 없이 잘 다녔고. 



박 긴 시간 수고하셨습니다이제 인터뷰는 끝내고 편하게 이야기 나눠보시죠.


민 : 사실 진짜 이야기는 녹음 끄면 나오는데 아쉽네요. (웃음)


  인터뷰를 끝내며 아쉬웠던 건 비단 저뿐이었을까요? 취재라는 명목 하에 각 잡고(?) 나눈 이야기다보니 미처 지면에 싣지 못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기억에만 남게 된 그 시절의 이야기가 아쉽기만 합니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은 마침 우해정 님의 생일이었습니다. 계세언, 김종섭 님 두 분은 동창의 생일을 축하하며 꽃과 케이크를 준비해주셨고, 조촐한 생일파티를 열었지요. 남편에게도 올해 생일축하 꽃을 못 받아봤다며 집에 가서 자랑해야겠다고 즐거워하시던 그 모습이 인터뷰가 끝난 지금도 선합니다. 


  학창시절 오고 가며 스쳐지나갔을지언정 막상 친구로 만난 적은 없었던 세 분이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동창회에서 만나 우정을 쌓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귀한 인연일까요. 한 곳에 머물며 오래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서울 사람들이기에 더욱 신기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옛 추억 속의 삼선교와 동소문동, 성북동의 모습처럼 세 분의 뒤늦게 시작된 남다른 우정도 오랜 추억으로 간직되길 소망하며 인터뷰를 끝맺습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참여하여 옛날 옛적 삼선교 일대의 모습과 어린 시절 추억을 들려주신 계세언, 김종섭, 우해정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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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1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8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8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8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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