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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Apr 01. 2019

성북동에는 왜 대사관저들이 많을까? - 대사관로 탐방기

[12호] 성북동 마을여행 | 글 백외준 · 사진 17717 김선문 

글 백외준 

사진 17717 김선문



성북동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성북로. 평소 이 길 양옆 가로등 밑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들이 태극기와 함께 걸려 있다. 이들 세계 국기의 행렬은 도로 초입의 플라타너스 가로수와 함께 성북로의 붙박이 경관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 국기들은 현재 성북동에 소재한 주한 외국 대사관저들의 국기들로, 성북구청이 한국과 이들 나라와의 우호 증진에 기여하려는 목적에서 내걸고 있다. 때때로 성북동에서 열리는 축제나 전시의 홍보 배너를 내거는 기간을 제외하면 성북로는 1년 내내 세계 국기 전시장이 된다. 국기들의 행렬은 성북로의 끝 1111번 버스 회차 지점 부근에 있는 우정의 공원까지 이어지는데, 2007년에 조성된 이 공원 역시 이들 국가와의 우호 증진을 위해 성북구가 조성한 장소이다. 그밖에 성북구청은 매년 개최하는 라틴아메리카 축제, 아프리카 축제, 유러피안 축제 등 세계 문화 축제와 대사관로 역사문화탐방 프로그램 등을 통해 성북동 소재 주한 대사관저 및 성북동 거주 외국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이를 지역의 문화자원으로 삼아 역사문화지구 성북동 알리기에 힘을 쏟고 있다.


성북동은 용산구 이태원동, 한남동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 외국 공관지역이다. 성북동의 주한 대사관저들은 대체로 삼청터널에서 정릉으로 이어지는 대사관로 주변 330번지 일대와 길상사와 성락원 주변 언덕 지대에 흩어져 있다. 대사관저는 주한 외국 대사와 그 가족들의 사적 거주공간이면서, 각국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크고 작은 외교 관련 행사들을 위한 공적 기능을 가진 특별한 장소이다. 2018년 10월 현재 성북동에는 유럽연합 포함 42개국의 대사관저와 2개국(네팔, 앙골라)의 대사관이 있다. 그밖에 각국 외교관들이 거주하는 단독주택과 공동주택들이 성북동에는 많다.


성북동이 주한 대사관저 부지로 주목 받은 것은 1970년대부터다. 1972년 일본 대사관저가 지금의 자리에 신축 입주한 것을 시작으로 1976년 서독(현 독일) 대사관저가 들어왔다. 이후로 꾸준히 각국의 대사관저들이 들어와 지금에 이르렀다. 현재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들이 모두 190개국이니까 그 공관들 중 약 22%가 성북동에 몰려 있는 셈이다. 왜 성북동에 이렇게 많은 대사관저들이 들어오게 되었을까? 그 과정은 1960년대 한국 현대사와 맞물려 있는 서울의 도시 변천과 깊은 연관이 있다.


6·25전쟁 이후 서울에는 인구가 빠른 속도로 유입되었다. 서울은 극심한 주택난에 봉착했고 주택 건설은 국가 차원의 문제로 떠올랐다. 해결을 위해 정부와 서울시는 대대적인 주택건설정책을 수립하고 서울 곳곳에서 택지조성사업을 펼쳤다. 이러한 주거 확장 사업 속에는 외국인 대상 임대 주택 건설 사업, 즉 외인주택단지 건설사업도 끼여 있었다. 1950년대에 서울에는 각국 외교관, 주한미군 장병들과 그들의 가족 등 수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거주지는 용산구 이태원동과 한남동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요에 턱없이 모자라는 주택 수와 낙후된 주거 환경 속에서 주한 외국인들 역시 안정된 집을 찾기 어려웠다. 이승만 정부는 주한 외국인들의 주거 문제를 외교·안보상 국익 확보를 위한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기존 외국인 거주지였던 이태원과 한남동에 새로이 외인주택단지를 건설해 분양했다.


1960년대 중반 서울에 사는 주한 외국인의 수는 크게 늘었다.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외교 다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임에 따라 국제 교류가 잦아진 까닭이다. 외국인을 위한 더 많은 주택 건설이 필요한 시점에서 정부는 외인아파트를 지어 주택공급물량을 대규모로 늘리는 한편 기존에 대한주택공사가 도맡아 추진했던 외인 주택건설 사업을 일부 민간 기업에 맡겨 시행토록 하였다.1) 서울시는 1967년 용산구를 벗어나 성북구 성북동에 외인주택을 건설할 것을 계획하고 대교산업을 시공사로 선정했다. 대교산업은 정부의 보증 아래 자금 29억 원을 대출 받아 성북동 산 25번지 일대 약 10만 평의 국유지에 단독주택과 아파트 2동, 도합 3백 50동의 외인용 주택 건설을 시작했다. 1967년 6월말에 착공한 주택 단지는 1969년 말 완공을 보았다.2) 이것이 오늘날 성북동 330번지 ‘대교단지’라고 부르는 주택단지와 성북아파트다. 비슷한 시기 대교단지와 가까운 곳에서는 좀 더 작은 규모의 외인주택단지가 건설되었다. 오늘날 ‘성락원마을’이라 부르는 지역이다. 당시 제동산업이 소유한 약 3만평의 대지에 미국의 체이스-맨해턴사, BOA은행, 칼텍스 석유회사 등 10여 개 외국 회사원 주택 14동이 건설되었다. 소요 자금은 제동산업과 입주하는 외국회사 간 직접 계약으로 조달되었다.3)



성북동 외인주택단지 건설이 순조롭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중반 외인주택이 들어서는 곳 주변으로는 작은 산동네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주택 건설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대교산업이 국가로부터 제공받은 대지만 해도 계획공원인 성북공원에 인접하고 경치가 좋은 풍치지구여서 서울에서 보기 드문 울창한 숲을 자랑하는 지역이었다. 주민들은 숲을 훼손하는 건설 사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서울시에 전달하였다. 하지만 서울시와 정부는 성북동에 대규모 외인주택단지를 건설하게 되면 연간 2백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다는 보도 자료를 내놓으면서 주민들의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4) 인근 성락원마을을 둘러싸고도 토지 소유주와 주민들 간에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다. 원래 시유지였던 땅이 개인 소유지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이동과 생활에 불편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5)


대교산업은 삼청터널 공사도 맡아서 시행했다. 성북동은 도심과 직선거리상 가깝다는 위치상의 장점이 있지만 주로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외교관들에게는 좁은 성북로를 빠져나와 혜화로터리와 율곡로를 통해 도심에 진입해야 했기 때문에 실제 교통 여건은 좋지 않을 터였다. 당장에 성북동 외인주택의 수익성 확보가 문제로 떠올랐다. 북악산을 뚫어 삼청동과 성북동을 잇는 터널의 개통은 이런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는 대안이었다. 1970년 12월 개통한 삼청터널은 성북동에서 시청까지 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게 해 주었다6).


1970년대 초 삼청터널의 개통으로 외인주택단지의 제반 여건이 갖추어짐에 따라 기존 한남동과 이태원 등지에 있던 대사관저들 중 일부가 속속 성북동으로 이전하였다. 새롭게 한국과 수교를 맺은 국가들도 대사관저를 성북동에 짓거나 빌려서 들어왔다. 1972년 일본대사관저가 330-180번지로 옮겨오면서 대사관저로서는 처음 성북동에 발을 들였다. 1976년 10월에는 용산구 동빙고동에 있던 서독 대사관저가 330-198번지 새로 지은 대사관저로 옮겨왔다.7) 이후 호주, 캐나다, 터키, 스웨덴 등 각국 대사관저가 차례로 성북동에 터를 잡았다. 이와 함께 내국인들, 그중에서도 한국의 유수 재벌기업의 회장들, 재력가들도 성북동에 모여들었다. 조용한 길과 맑은 공기. 거기에다 이웃에 대사관저가 있기 때문에 보안 걱정도 덜 수 있으니 돈 있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만족스러운 주거 환경이었다. 그리하여 성북동 외인주택단지는 1980년을 전후한 시기, 신흥 고급주택지로 변모했고 ‘부촌’으로 이름이 났다.


성북동 소재 주한대사관저 현황 (2018년 10월 현재)

○ 아시아(15개국) : 중국, 일본, 네팔(대사관), 방글라데시, 싱가포르, 스리랑카, 카자흐스탄, 브루나이, 아제르바이잔, 이라크, 요르단,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아프가니스탄

○ 유럽(11개국) :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 덴마크, 터키, 그리스, 아일랜드, 스웨덴, 폴란드, 노르웨이, 유럽연합

○ 아프리카(10개국) : 잠비아, 나이지리아, 튀니지, 탄자니아, 수단, 남아프리카공화국, 케냐, 에티오피아, 알제리, 앙골라(대사관) 

○ 라틴아메리카(4개국) : 멕시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브라질 

○ 오세아니아(2개국) : 호주, 파푸아뉴기니


2018년 10월 현재 성북동에 있는 42개국 대사관저와 대사관의 목록은 위 표와 같다. 대사관저는 대사관과 마찬가지로 국제협약 상 보호를 받는다. 내국인은 허가 없이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다. 이는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1961) 제22조 1항 ‘공관지역은 불가침이다. 접수국의 관헌은, 공관장의 동의 없이는 공관지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조문에 따른 것이다. 원칙은 삼엄하지만, 대사관저의 대문 앞까지 가보는 것은 자유다. 담장 안 낯선 국기가 펄럭이고, 대문 옆에는 그 나라를 상징하는 문장이 내걸려 있다. 그것은 세계로 열린 작은 창이다. 그러나 이들 대사관저가 분포해 있는 대사관로를 산책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예 인도가 없는데다 삼청터널을 오가는 차량들은 사람이 걷고 있건 말건 쌩쌩 달린다. 서울에 이렇게 위험하고 삭막한 주택가가 또

있을까 싶다. 1967년 처음 주택단지를 건설할 때에는 주택뿐 아니라 학교, 유치원, 오락장, 놀이터, 식료품점, 수영장이 들어선다고도 보도됐다.8) 그러나 이 중에서 현재 있는 것은 작은 슈퍼마켓 단 한 곳뿐이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 할까? 고급주택들로 가득 차 있지만 부족한 것이 더 많은 동네. 조성 계획과 달리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1967년 공사 이후 계획이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 굳이 그래야만 했을까? 그 이유를 알아내고 싶다.   [끝] 



백외준은 성북문화원 성북학연구팀장이다. 1981년 광양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는 역사학을 공부했다. 2013년부터 성북문화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동료들과 정릉, 미아리고개, 성북동, 보문동, 안암동을 주제로 한 책들을 펴냈다. 



1) 임형선, 「1960, 70년대 서울 外人아파트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석사학위논문, 2016, 29쪽.

2) 『동아일보』 1967. 6. 26. 

3) 『매일경제』 1967. 7. 7.

4) 『동아일보』 1967. 6. 26. 

5) 『경향신문』 1967. 12. 20.

6) 『경향신문』 1970. 12. 30. 

7 ) 『동아일보』 1976. 10. 13.

8) 『동아일보』 1967. 5. 1.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2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8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8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8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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