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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Apr 10. 2019

문인들의 커뮤니티로서의 성북구

[12호] 우리 동네 작가를 소개합니다 | 글 김준현 · 사진 17717

글 김준현

사진 17717 김선문 



- 성북동·정릉동을 중심으로 ② 


성북구의 문인. 그들의 일상적 삶, 그리고 학교

지난 11호에 이어서, ‘문인들의 커뮤니티로서의 성북구’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볼까 합니다. 지난 호에서는 ‘거주사실’로서 지역 문인들을 판가름해서 일별하고 연구하는 흐름을 지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 그리고 문인 개인의 활동 뿐 아니라 문인들이 서로 교류하는 양상을 주목하고 복원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각으로 접근했을 때 ‘성북구의 문학과 문인’들을 더욱 풍성하게 재구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가 되었지요.


이번에는 문인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먼저 질문을 던져 봅시다. 문인들은,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구별해서 보아야 할 특별하고 예외적인 존재일까요? 아니면 그들 자신도 우리들, 그리고 이웃들과 같이 일상적인 삶을 누리며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해야 했던, 한 명의 보통사람으로 보아야 할 존재일까요? 


이 질문을 보는 독자는, 아마 ‘별 희한한 걸 다 묻는다. 당연히 특별한 점도 있고, 보통 사람들처럼 살던 측면도 있겠지’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맞습니다. 사실 당연한 거지요. 문인들 개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그들도 사람인만큼 평범한 문제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었고, 또 예술가인 만큼 보통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지점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문인·예술가를 연구하고 살피는 경우에는, 그들의 ‘평범한 면’보다는 ‘특별한 면’이 훨씬 더 강조되어 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들을 예외적인 존재로 접근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남달랐는가. 그리고 얼마나 지사적으로, 혹은 예술가적으로 살았는가를 조명하는 데에만 주력했던 셈이지요.


하지만 지역내러티브가 발전하고, 지역과 문인들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관점들이 생기면서는 문인들이 영위했던 삶의 일상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역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 사회·문화적 조건이 있고, 그 영향을 받아서 주민들의 삶이 구성되지요. 마찬가지로 문인들의 삶도 이런 조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과 ‘문인’의 관계가 중요해지는 셈이지요. 지역내러티브에서는 문인들 역시 ‘지역주민’의 한 사람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이런 훌륭한 문인이 살았던 우리 고장이 자랑스럽다’고 접근할 것이 아니라, ‘우리 고장의 특성이 이런 훌륭한 문인들을 길러내고, 또 모아들였다’고 접근하는 것이 지역 문인 연구의 추세라고 할 수 있는 셈입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성북구에는 왜 문인들이 많이 살았던 걸까요? 기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지만, 흔히 ‘서울에서 종로구 다음으로 문인이 많은’ 동네라고 하지요.

그것은 문인들이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경제적인 문제와 큰 연관성이 있습니다. 앞에서 문인들도 보통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예외 없이, 먹고 사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문인들 중 대부분도,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겠지요.


염상섭 선생이 말년에 성북구에 거주했다는 것은 이제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염상섭 선생은 모두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 이광수, 김동인과 함께 초기 현대소설을 대표하는 주요 작가 중 한 명이지요. 하지만 이 분의 말년은 꽤 불우했답니다. 여러 문인의 수필이나 증언에서, 염상섭 선생의 형편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염려가 들어 있습니다. 염상섭 정도의 위치를 가진 문인도, 기본적인 식생활을 어려움 없이 영위할 정도의 경제적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은 꽤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글을 쓰는 것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효율적인 직업은 아닙니다. 전업 작가(순전히 글을 쓰는 것만을 직업으로 하는 작가)로 살 수 있는 문인의 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극소수입니다.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받기 위해 낮에는 회사에 나가고, 밤에는 피로로 내려오는 눈꺼풀을 붙들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이 대부분 작가들의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굴레였지요.

그럼 문인들이 가졌던 직업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언론인, 즉 신문·잡지의 기자나 편집자는 예나 지금이나 문인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직업입니다. 염상섭 선생의 작품이 철저하게 사실성을 추구하는 것도, 선생이 신문기자로 오래 생활했던 것과 관련이 깊지요. 그리고 출판사에서 편집이나 번역을 했던 문인들도 많지요. 우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문인들이, 문인이면서 동시에 언론인·출판인이습니다. 


그리고 또 문인들에게 각광받는 직업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각급 학교의 교사·교수, 즉 ‘선생님’입니다. 대단히 많은 분들이 낮에는 스승·교육자, 밤에는 문인으로 살았지요. 종로구에 많은 문인들이 거주했던 것은, 거기에 출판사와 언론사들이 매우 촘촘하게 포진했던 것과 연관이 깊습니다. 같은 이치로, 성북구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학교로 둘러싸여 있지요. 그 학교에 스승으로 종사했던 문인들이, 성북구의 주민이 되는 것은 지극히 자유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북구가 교육자들의 중요한 주거지가 되는 데 기여한 것으로는 지금 남아 있는 고려대학교, 경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성북구와 연접해 있는 동소문 바로 안쪽, 즉 혜화동 학교들의 역할도 컸습니다. 지금은 의과대학만 남기고 이사를 갔지만 서울대학교 본교도 있었지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동소문 밖으로 퇴근하여 저녁에 성북구 주민으로서의 삶으로 돌아가는 교육자들이 많았습니다.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교수들도 성북동에 다수 거주하게 되지요. 인근 성균관대까지 합하면 메머드 급 학교의 교수들이 성북동에 모여들어 거주하게 된 것입니다. ‘성북동에 교육자가 많이 산다’는 이미지는 1950~60년대 대중소설만 봐도 일반 독자들에게 폭넓게 공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를 간 서울대학교 말고도, 지금은 사라진 보성고등학교, 서라벌예술대학교 등이 문인들에게 중요한 일자리를 제공해주던 학교들이었습니다. 보성고등학교는 지금의 서울과학고등학교 자리에 있었고, 서라벌예술대학교는 지금의 돈암동에 위치해 있었지요. 이렇듯 성북구에 많은 학교가 위치하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에 사대문 밖으로 택지를 조성하는 과정,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성북구에 젊은 인구가 몰려들어 그 자녀들을 교육할 학교들이 필요해지게 되는 과정을 겪은 사회·문화사적 조건들과 관계가 깊습니다.

결국 성북구와 문인들의 깊은 연관성은 이런 문인들의 직업 선택의 문제로부터도 조명해 올 수가 있는 것이지요.


성북구의 학교 커뮤니티, 그리고 언론 커뮤니티

앞장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성북구에는 학교가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성북동의 문학과 관련된 커뮤니티 인프라가 구축되는 데 기여했던 것은 성북동을 옆에 두면서 인문학적 학풍을 강하게 유지했던 고려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교의 역할이 컸습니다.


조지훈 선생과 정한숙 선생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초기 기틀을 다진 문인들로, 해방 이후 문단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성북초등학교, 홍대부고 근처에 거주하면서, 고려대학교 제자들을 불러서 술잔을 기울이곤 했었다고 합니다. 1950~60년대에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을 다녔던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두 분 다 애주가였고, 술을 마시는 것 또한 문학을 수련하는 중요한 방편이라고 생각하셨던 분들이지요(조지훈 선생은 「주도 18단계」라는 글을 남기시기도 했지요!). 두 분이 댁 근처 선술집으로 학생들을 불러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그야말로 다반사라고 할 정도로 일상적인 일이었고,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신 조지훈 선생은 학생들을 댁으로 불러서 전공 수업을 진행하셨다고도 합니다. 학교가 위치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 학교에 속한 교육자들의 거주지였다는 사실이 이런 문학 커뮤니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이 고장에서 직접 목격한 여러 문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에 대한 기억과 증언을 수집하면 더 질감 있는 성북의 문인들을 재구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지역 문학 연구는 이런 방향으로 진행될 거라는 예상 또한 해볼 수 있지요. 


서라벌예술대학교는 우리나라 대학 최초로 ‘문예창작학과’를 만든 학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앙대학교에 합병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성북구와 문학의 관계를 논할 때 빠져서는 안 될 곳이지요. 김동리, 안수길, 박목월, 박연희, 김용호, 백철, 서정주 등 당시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교수로 재직하거나, 강사로 출강했었습니다. 이들이 ‘문예창작학과’ 학생들과 함께 학교 앞 동리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 얘기를 나누고 창작을 논하던 것은, 그것 자체로 중요한 성북의 무형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라벌예술대학교에 출강했던 문인들은 주소지가 달라서 1차적인 ‘성북문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라도, 성북의 문학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는 훌륭히 ‘성북문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셈이지요. 


<현대문학>, <문장>, <자유문학> 등 여러 중요 문예지의 필진과 편집자들이 성북동과 정릉동에 거주했다는 것은 지난 호에도 언급했었지요. 

<현대문학>과 <자유문학>은 1950년대 문단을 양분했던 거대 문예지였습니다. 서로 문학관도 다르고, 예술원 선거 등으로 갈등이 생기면서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웠던 적도 있지요. 문학사에서는 <현대문학> 계열문인, <자유문학> 계열 문인이라고 구별해서 부르면서, 이분법적으로 대립했던 문인 집단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상호 대립적이었던 두 잡지도, 그 구성원, 즉 참여 문인들의 주거지와 활동지를 중심으로 그 관계를 재구성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되지요. 바로 성북동과 정릉동의 주민들이 태반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낮에는 각각 몸담던 문단의 거점이었던 잡지사에서 서로에 대한 비판적인 언사를 쏟아내면서도, 밤에는 합승을 하거나 같은 전차를 타고 성북으로 돌아와서 옆 테이블에서 때로는 서로를 외면하며, 때로는 서로에게 말을 걸고 농을 걸기도 하면서 술잔을 기울이던 같은 동네 주민이었던 것이지요. ‘성북’이라는 키워드로 문인들의 삶에 접근하면, 지금까지 문학사에서 이야기했던 문인들의 삶과 업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재구성될 수 있는 셈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제는 문인들의 삶을 정리해서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들이 거주하고 활동했음을 기념하기 위한 ‘지역문학’에서 나아가, ‘지역과 문인들의 생활’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새로운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역문학’이나 ‘지역문학사’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때로는 천변에서, 우리와 마주치는 문인들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요. 우리가 만나는 문인들의 인간적인 면모. 예술가라는 특별한 존재 이전에, 같은 동네 주민으로서 보여주었던 그들의 면모를 우리가 기록하고, 또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끝] 




김준현은 성신여자대학교 문화내러티브 전공교수이다. 고려대학교에서 현대문학/소설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상허학회 총무이사, 한국여성문학학회 연구이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 상허학보 편집위원이다. 주요 논문 및 저서로는 <전후 문학 장의 형성과 문예지>, <해방이라는 한국문학의 경계와 이태준> 등이 있다.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2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8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8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8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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