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호] 동네 이슈 | 글·사진 김경아
글 김경아 동구여중 정상화를 위한 학부모 모임 대표
사진 동구여중 정상화를 위한 학부모 모임
학부모라는 이름
당신은 부모입니까, 학부모입니까.
오래전 많이 이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광고. 아이의 꿈과 행복보다 당장의 경쟁에서 이기기만을 바라는 부모들의 세태에 경종을 울리며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나의 경우 학부모란 이름표를 처음 달았을 때, 부모와 학부모의 차이같은 심오한 고민보다는 단순하게 밀려오는 두려움이 있었다. 아침잠 많은 내가 아이를 제 시간에 보낼 수 있을까? 매사에 허둥지둥 하는 내가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 줄 수 있을까? 성적은 고사하고 숙제라도 꼬박꼬박 봐줘야 할 텐데... 무엇보다 학부모가 된다는 건 진짜 어른이 되는 것. 학교에서 도덕과 질서를 배우게 될 아이 앞에서 나는 진짜 어른 노릇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나, 일가친척 앞에서 혼인서약을 낭독할 때나, 첫 아이를 출산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학교라는 세상에 첫 발을 뗀 아이가 12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인생이 결정될 거라는 생각, 그 12년 동안 엄마로서 아이의 학교생활을 잘 관리해 주어야 하는 의무. 그런 생각에 이르니 머리가 복잡하고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학교에 맡겼습니다
하지만 이런 걱정도 막상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학기쯤 지날 무렵 자의반 타의반으로 희미해져갔다. 생애 첫 담임 선생님이었던 나이 지긋하신 여자 선생님은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들을 한없이 너그러운 할머니의 마음으로 보듬어주셨고, 담임 선생님과의 첫 상담에서 떨고 있던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게 가르치고 키운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아이들은 스스로 배우고 자란답니다. 부모는 단지 아이가 자연스럽게 크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떨어져서 지켜봐주면 돼요”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떨어져 내 머리 위를 비추는 느낌. 나는 그 순간부터 아이는 학교에 맡기고 학교가 요구하는 것, 예컨대 녹색어머니나 급식봉사 같은 것만 열심히 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의 부담을 훌훌 털어버렸다.
이런 생각은 딸아이가 동구여중에 입학하면서 더욱 굳어졌다. 중2병과 사춘기를 조심하라는 선배들의 충고가 무색하게 딸아이는 중학생이 되자 어느 때보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다. 노후한 시설이나 가파른 언덕길은 문제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활동, 머리가 굵어지며 친구와 선후배,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배움과 경험이 나날이 두터워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부모로서 별로 한 게 없는데도 아이가 잘 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예전 그 할머니 담임 선생님의 금과옥조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혁신학교인 동구여중의 학교문화도 큰 몫을 했다. 아이들의 자치를 중요시하고 선생님들의 열정도 남달랐다. 하지만, 혁신학교에 보내고 싶어서 성북동으로 이사를 결정한 스스로에게 잘했다며 뿌듯해하고 있을 즈음, 생각지도 않은 사달이 났다.
교장선생님이 없는 학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3월 2일, 그날은 신입생 입학식이자 2학년에 올라가는 딸아이의 개학날이었다. 난데없이 교장선생님이 교문 밖에서 1인 시위를 하고 계셨다. ‘저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쓰인 피켓을 든 선생님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 있었다. 등교하는 아이들과 입학식에 온 학부모들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입학식은 결국 교장선생님 없이 진행됐다.
그 후 동구여중은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교장 공석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교장선생님은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으며 이대로 가다간 졸업식도 교장선생님 없이 치러야 할 판이다.
그 사이, 그냥 아이를 학교에 맡기면 만사가 오케이였던 나는 ‘동구여중 정상화를 위한 학부모 모임’의 대표가 되어 우리나라 사립학교의 어둡고 긴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 ‘당하고’ 있는 중이다.
학교의 또 다른 면을 보다
동구여중은 사립학교다. 사립 초등학교라면 몰라도 사립 중학교라는 건 학부모들에게 그다지 특별한 관심사가 아니다. 사는 곳에 따라 자동배정되는데다 주위에 워낙 사립학교가 많아서 그저 다 같은 학교라 여길 뿐.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학교의 겉모습과 속사정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의무교육인 중학교까지는 사립이든 공립이든 비슷하지 않을까 싶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구조 속에 놓여있다. 그 구조적 차이 때문에 교사의 위상이 달라지고 교육환경에 편차가 발생한다. 재단이 가지고 있는 막강한 인사권은 교육적 가치와 사명감을 생명처럼 여기는 선생님들을 일순간 사기업의 고용인으로 전락시킨다. 흔한 말로 공무원이나 교직원을 철밥통이라 부르며 비꼬기도 하지만, 사립학교에서 정년이 보장되는 철밥통은 어떤 부당한 상황에도 재단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나 가능한 일. 동구학원은 지난 3년간 재단의 부당처우에 항의하는 평교사를 대상으로 30여 건에 이르는 고소·고발을 했고, 교육청이 임명한 교장선생님을 해임한 후 교육부 교원소청심사위에서 두 번이나 복직판정을 내렸음에도 또 다시 직위해제를 강행했다.
법대로 돌아가는 세상, 멋대로 돌아가는 사학
학부모들은 그저 어리둥절했다. ‘세상에 교장 없는 학교가 어딨어’, ‘교장선생님이 갑자기 병이 난 것도 아니고 교육적으로 지탄받을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못 돌아오는 거지?’ 라는 단순한 질문이 학부모들을 교육청에 찾아가게 하고, 정치인을 만나게 하고, 급기야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넣게 했다. 지난 8월 200여 명의 아이들과 엄마들이 교육청과 시의회를 찾아 학교정상화를 호소했고, 성북동 일대에 100여 개의 현수막을 걸어 언론에도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놀라운 건 모든 게 ‘법’, 법대로 진행된 일이라는 것이다.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도 바꾸는 세상에 수십 년간 기득권 사학을 지켜주고 있는 그 요상한 사학법이란 것 때문에 이 모든 비정상의 상황이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이 된다.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시험, 급식, 채용, 폭력, 성문제와 관련된 대부분의 비위 행위가 사립학교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학을 관리 감독하는 교육청조차 무력화시키는 것이 사학의 자율성과 인사권을 보장하는 사학법에서 비롯됐다. 반대로 이런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항의하는 학교 구성원들을 소외시키고 쫓아내는 것도 사학법에서 비롯한다. 이쯤 되면 사학법은 그저 사악한 법일 뿐 교육을 위한 법이 아니다. 철밥통이란 표현에는 어떤 부당한 권력 앞에서도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최소한의 신분보장이 되어야 한다는 뜻도 있을 테지만, 문제의 사학법은 종잇장처럼 찌그러지고 굴욕적인 철밥통을 강요하면서 교육의 공공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는 누구의 것인가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국민’이라 답할 수 있는 사회라면,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라는 말에도 쉽사리 동의할 것이다. 학교는 학생을 위해, 학생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립학교 운영예산의 90퍼센트 이상을 국가가 지원하는 이유는 개인이 설립한 학교라 할지라도 교육이라는 공공성을 기반으로 한 공적 기관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동구학원은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친일파인 김활란이 설립했지만 실제 재단 출연금은 지역의 학부모와 독지가들이 만든 후원회의 비중이 훨씬 컸다고 하니 그야말로 지역사회의 자산이라 해야 마땅하다. 그런 이유로 동구학원은 더 더욱 학생, 학부모, 교사와 지역사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학교란 그저 교실에서 일정한 시간에 수업을 하고, 급식을 먹고, 정해진 활동을 하면 끝나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10대의 청소년과 20대부터 60대에 이르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소통하고 부대끼는 작은 사회다. 아이들은 3년을, 선생님들은 30년 이상을 이곳에서 지내며 성장한다. 학교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건강할 때도 있지만 아플 때도 있다. 학교공동체가 병들었을 때 아픈 곳을 치료하고 다시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구성원들의 몫이다.
그래서 지금의 동구학원 사태는 법적 당사자 몇 사람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느냐 하는 문제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 사태로 인해 상처받았을 교사와 학생, 학부모를 보듬고 혁신학교로서 지역사회와 맺은 관계를 단단히 지켜가면서 모두를 위한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더라도
처음 학부모들이 학교정상화를 위한 모임을 만들고 활동을 시작했을 때, 누군가는 지금껏 사학분쟁에서 학부모가 나선 사례는 없었다며 반색했고 누군가는 거대한 사학재단을 상대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우려했다.
하지만 동구여중 학부모들은 기꺼이 바위로 돌진하는 계란이 되기로 하고 서로를 격려했다. 몇 사람의 힘으로 바위보다 단단한 사학의 벽을 일시에 깰 수는 없지만 작은, 정말 아주 작은 틈이라도 낼 수 있다면 그 작은 균열로 인해 언젠가는 거대한 장벽도 무너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다행인 것은 끝이 안 보이는 막막한 시간 속에서도 서로를 응원하며 이 상황을 단지 누군가와의 싸움이 아니라 좋은 학교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머리를 맞대는 우정 어린 엄마들이 있다는 점이다. 많은 부침을 겪으면서도 내 아이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부모가 아니라 교육의 공공성을 고민하는 진정한 학부모로 성장할 수 있다면, ‘당신은 부모입니까, 학부모입니까’라는 질문 앞에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아이를 학교에 맡겼다는 말 뒤에 숨어서 학교일에 무심했던 나 자신부터 반성하며 학교 구성원으로서 건강한 목소리를 내는 학부모들이 있는 한 언젠가는 학교도 정상화의 길을 찾지 않을까 한다. 학창시절의 추억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갈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끝]
김경아는 대학졸업 후 상경하여 20년째 서울살이 중이다. 성북구 안에서만 일곱 번 이사를 하고 2년 전 성북동으로 옮겨 온 도시 유목민. 아침 새소리와 노을 지는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성북동에 오래 살고 싶다. 13년간의 직장생활을 끝으로 경력단절여성이 되자마자 때마침 마을공동체 붐을 타 활동가 세계에 발들였다. 이런저런 마을활동을 한지 7년째가 되지만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정체불명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2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8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8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8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