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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Jun 06. 2020

역사가 숨 쉬는 조선의 궁궐, 창경궁을 찾아서 ①

[13호] 이웃 동네 문화재 탐방 | 글 박진하 · 사진 김선문

글 박진하

사진 17717 김선문



월근문과 경모궁


가끔은 가볍게 산책을 하려 한다면 한양도성을 따라 와룡공원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성균관대학교 후문을 지나 명륜동 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측으로 창경궁의 담장이 보인다.

이 궁궐은 다소 별궁에 가깝지만 경복궁과 창덕궁 다음으로 규모 면에서나 조선 왕조사에서 차지하는 위상 면에서도 세 번째인 궁전이다. 또한 동쪽 위치한 궁궐이라 하여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이들 두 궁전의 지맥은 북악산 동쪽에 위치한 응봉에서 시작한다. 북악산이 동쪽으로 흘러 크게 뭉쳐 솟아 오른 것이 응봉이요, 이것이 기세 좋게 꿈틀대며 내려오다 종묘에서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 지맥의 동쪽에 위치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그런 산세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지점이 성균관대학교 입구이다. 즉 응봉의 산줄기를 평탄하게 깎아서 평지로 만드는 것을 대신해서 그저 산의 흐름에 따라 담장을 치고 원래 있던 자연 그대로를 궁궐 후원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니 담장은 요동칠 수밖에 없다. 그 담장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있는 사람의 맥박처럼 지맥이 살아 숨 쉬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그 창경궁의 담장을 곁에 두고 조금 더 나아가 어린이 과학관으로 빠져 나오면 궁문을 만나게 된다. 솟을 대문을 두 개 맞붙여 하나는 크게 그 곁은 보다 적게 만든 것이다. 이 창경궁의 북쪽에 위치한 궁문이 ‘월근문(月覲門)’이다. 매월 뵙겠다는 의미를 가진 이 궁문은 정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누굴 뵙겠다는 뜻일까?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신위를 뵙겠다는 뜻이다. 지금은 서울대학병원이 차지하고 있는 그 공간에 사도세자의 신위를 모신 경모궁이 있었다. 그러니 매월 초가 되면 정조는 승지와 사관 그리고 입직한 도총부와 병조의 당상과 낭청만 가마를 따르게 하여 이 문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임금이 탄 가마는 큰 문으로 이를 따르는 수행원들은 작은 문으로 출입했을 것이다.


나도 그 발자취를 따라 서울대학병원으로 향한다. 혜화로 도로변에서 출입할 수 있는 동문의 북쪽 정원에는 ‘함춘원(含春苑)’의 유적지라는 안내문과 함께 둥근 형태의 섬을 만들 때 사용되어진 석조물이 진열되어 있다. 이는 커다란 장방형의 연못 속에 둥근 세 개의 인공 섬을 만들어 삼신산을 상징하게 하였는데 그 때 사용된 석재인 것이다.

그곳에서 창경궁 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경모궁을 만나게 된다. 지금은 함춘문과 신위를 모신 사당 즉 운궁이 위치하던 월대만 남아 있다. 이처럼 현재 잔존하고 있는 함춘문은 가장 간단한 지붕형식으로 책을 반쯤 펴놓은 八자형으로 되어 있는 맞배지붕의 목조건물이다. 또 신위를 모시는 운궁인 까닭에 화려한 단청을 피하고 붉은 주칠과 노란 황토 빛으로 장식하고 있어 선명함이 대비되면서 묘한 단아함이 배여 있다.

지금은 발굴조사 과정이므로 가운데 뜰은 흙밭이지만 그 건너편에 위치한 장대석을 3단 높이로 쌓아 만든 월대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뜰에서 이 월대로 올라갈 때 사용하는 계단은 모두 3개이며 중앙에 위치한 것은 혼령이나 제사에 쓰이는 향 등이 옮겨질 때 사용되었으며 오른쪽 길은 왕이 이용하던 어로이다. 나머지 왼쪽 것은 세자로이다. 그 계단의 난간석인 소매 돌은 영혼이 둥글게 뭉쳐져 지상에서 출발하여 무지개를 타고 상승이라도 하라는 것처럼 곡선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 위기단석까지는 보존되어있으나 신위를 모시는 운당 즉 신당 건물은 사라져 버렸다.

이젠 이곳에 모셔져 있던 사도세자 신위도 정식 왕으로 추존(追尊)1)되어 종묘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인을 잃은 이 경모궁은 용도폐기 상태에서 방치되어 버린 것이다.


    1) 예전에, 제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을 높이는 뜻으로 제왕의 칭호를 주는

일을 이르던 말.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은 사도세자는 사후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창경궁 최고의 전망대 그리고 홍화문

드디어 창경궁을 마주 볼 시간이 되었다. 그 전에 창경궁을 한눈에 일견해 볼 수 없을까? 우리 한국화에서 풍경화를 그릴 땐 새가 하늘 높이 떠올라 땅위의 풍경을 내려다보듯 그 시야(조감, 鳥瞰)에서 그리게 된다. 오늘의 주인공인 창경궁 전체를 그린다면 어디에서 스케치하면 좋을까?

그 전망대가 이 병원 내에 있다. 암센터 4층에 가면 베란다에 행복정원이라는 장소가 있는데 그곳이 명당이다. 그곳엔 각 정전과 편전 그리고 침전의 위치까지 표시해 둔 친절한 안내판이 있어 전체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인 셈이다.

창경궁의 가장 앞에 위치한 넓디넓은 그 공간은 지금은 6차선 간선도로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곳엔 궁궐 앞 광장이 있었다. 무과 시험을 볼 때 시험장으로 사용될 수 있을 만큼 큰 광장이었다. 표적 판을 향하여 활을 쏘기도 했을 것이고 말을 타고 활시위를 당겨 표적을 적중시킬 때마다 구경 나온 사람들의 탄성과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을 것이다. 아님 마상에서 창을 비켜들고 있다가 표적물을 찌르거나 크게 휘둘려 허수아비를 경쾌하게 자르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 뒤로는 장엄하게 버티고 있는 홍화문이 있으며 그 너머로 중문인 명정문이 자리 잡고 있다. 커다란 뜰 뒤로 정면을 호령하듯 지켜보는 건물은 이 창경궁의 큰 어른이신 정전, 명정전이다. 그 왼쪽에 남면하고 있는 커다란 건물이 왕의 집무 공간인 편전, 문정전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편전과 정전 사이에 끼여 있는 건물이 숭문당인 것이다. 잘 안 보이는 것은 함인정도 마찬가지지만 정전의 뒤쪽에서 북쪽으로 조금 이동하여 위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함인정의 북쪽에 있는 왕의 침실인 환경전까지가 외전이다. 일반 양반가에서 사랑채 같은 것으로 주로 왕이 활동하는 공간인 셈이다.

더 북쪽으로는 내전이 있다. 앞서 서술한 왕의 침실인 환경전은 남향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과는 달리 ‘ㄴ’의 위치에 동향으로 지어진 건물이 경춘전이다. 왕비나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자 침실로 사용된 곳이다. 보다 북쪽에 위치한 큰 건물은 그 크기로 보아도 중요한 건물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궁전으로 왕실의 큰 어른이신 왕대비나 왕비의 침실인 것이다. 그 옆으로는 여인들의 생활공간인 양화당이 있으며 후비들의 거처인 집복헌과 영춘헌은 이곳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이처럼 좋은 조망 처이지만 해가 질 무렵에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 창경궁 뒤쪽으로 지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역광인 탓에 사진도 찍을 수 없다. 또 이곳이 병원인 만큼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건 기본이다.


드디어 창경궁에 도착했다. 홍화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지금은 그 큰 광장을 도로에 내어주고 있으나 꽤나 넓은 공간이었다. 또한 이곳은 다른 궁문에 비해 인가가 가까워 백성들도 접근하기 편했다. 때문에 왕이 이곳까지 왕림하여 백성들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또 가뭄 때는 쌀을 나누어 주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정조는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때 그를 기념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휼미를 나누어 주던 그 장소인 것이다.

그 광장의 뒤 2층 누각으로 세워진 궁문이 홍화문이다. 당초 동소문의 이름이 홍화문이었으나 그 이름을 이 창경궁에 내어주고 혜화문으로 바꾸게 만든 그 장본인이다. 양쪽 처마 끝이 날렵하게 올라간 이 홍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만들어졌다. 들어가면서 오른쪽에 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2층 누각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이 궁문을 지나면 바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 돌로 만든 옥천교이다. 궁의 북쪽 춘당지에서 기원한 물길이 흘러 궁문과 중문 사이로 흐르게 만든 하천이 옥천이다. 맑은 물이 흐른다하여 옥천이라 하였고 이 조그마

한 하천은 이 궁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의 잡념을 씻어버리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라는 상징물인 것이다.

이 교각은 두 개의 아치형식으로 홍예를 틀어 만든 것으로 둘 사이에 새겨진 귀면 상은 벽사의 의미를 담았겠지만 무섭다기보다 살짝 웃는 듯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위쪽은 3도로 구분되어 있으며 가운데 어도를 중심으로 왕이 거동 할 때 좌우에 호위하는 의장대 행렬을 고려한 것이다. 난간의 시작점과 종착점에는 석수를 조각해 두었으나 그 사이의 난간장식이 더 눈에 띤다. 전체 5칸을 결합하는 중간에 사각 석을 세우고 그 위로 새겨진 꽃 봉우리가 귀엽다. 그 사이에 끼운 판석에는 꽃무늬의 풍혈을 뚫어 시원한 개방감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두 개의 풍혈 사이로 양각으로 돋을새김을 한 장식기둥이 일품이다. 둥근 배흘림 기둥위로 주두 장식이, 그 밑에는 주 초석을 새기고 그 사이로 구슬모양의 장식을 더했다. 화려하지도 않아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게 진짜 장인의 솜씨이다.


어린 날의 소풍지, 창경궁

그 교각 너머에 있는 명정문은 지금 공사 중이라 볼 수도 없고 통행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발길이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옥천 주위로 관상목들이 식재되어 있는데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앵두나무이다. 어릴 때 생각해보면 집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 이 나무이었는데 그 이유를 몰랐다가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는 세종이 가장 좋아하던 과일이란다. 이 조그맣게 시큼한 것을 좋아하셨다니 하는 생각이 든다. 허나 이 성군의 업적을 기리며 이 앵두나무를 주변에 가꾼 사람들의 품성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어 매화나 살구를 비롯하여 조선 왕조의 상징인 오얏 꽃을 맺는 자두나무 등이 나란히 우리를 반긴다. 이들 꽃들은 비슷해서 구분하기도 어렵다. 이들이 한창일 이른 봄에 오면 모양이 유사한 하얀 꽃들로 꽃 대궐을 이룰 것을 상상하며 행각으로 다가간다.


이른바 남 행각으로 칸막이를 하여 곳간이나 부대시설로 사용하던 공간이다. 지금은 붉은 원주만 나란히 줄맞추어 서있다. 앞뒤로 두 개의 붉은 주칠로 단장한 둥근 원주와 이와는 조금 더 뒤 쪽으로 떨어져 있는 목제 벽체 또한 붉은 색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장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또 벽체는 네 칸으로 나누고 이걸 흰 선으로 테두리를 만들어 구분하고 있다.

특히 하단의 장방형이 위보다 더 높게 해 안정감이 느껴지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붉은 주칠의 원주가 두 줄로 병렬해 있는 것이 교토의 이나리 신사에서 느껴졌던 감동이 되살아나게 한다. 그 신사에는 붉게 주칠한 키 큰 도리 너머로 또 하나의 도리가 있어 1천개의 붉은 도리가 산비탈을 따라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규모 면에서는 이 행각이 그에 비할 수 없으나 또 다른 점이 있으니 눈여겨 볼만하다. 천정을 가로지르는 대들보에는 청록색을 바탕으로 연꽃무늬 단청을 하고 그 위에 나란히 천정을 받치고 있는 서까래의 행렬도 청록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사이로 세로로 관통하고 있는 도리는 붉은 주칠이니 이 또한 무슨 묘한 조화란 말인가.


이런 행각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럼 눈앞으로 푸른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물론 다른 관목들과 교목들도 함께 하고 있다. 지금은 이렇게 넓은 공터에 여러 나무들이 가꾸어져 궁중 숲으로 꾸며진 공간이 되었지만 당초는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도총부와 궁내 가마와 말들을 관리하는 사무실(궐내 각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걸 일제는 이런 전각을 파괴하고 파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훼손 작업은 1908년 4월에 시작되어 허물어 낸 건축자재는 다 매각하고 초석이나 댓돌 같은 석재마저도 흔적도 없이 파헤치고 옮겨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곤 이 땅에 동물원을 만들어 일반인에게 개방함으로써 식민지 조선 최고의 유흥지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이 동물들이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진 1983년 7월까지 내원에 설치한 식물원과 더불어 우리 민중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위로해주는 그런 유원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이전에 초등학교를 다니던 사람들이라면 ‘창경원’2)과 관련된 아름다운 추억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창경궁에는 벚꽃들도 많았다. 일본의 상징인 벚꽃들을 대량으로 심고 가꾸었던 것이다. 지금은 벚꽃 놀이하면 서울에선 다들 여의도로 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그 곳에 벚꽃이 많게 된 것이 이 창경궁에 있던 벚꽃들을 그곳으로 이식하면서 생긴 일인 것이다.


    2) 일제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궁궐이 갖는 상징성을 격하시켰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사라진 동궁전

이런 과거를 회상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선인문을 만나게 된다. 궁내 사무실로 출근하는 관리들이나 편전에서 왕을 접견하려던 대신들이 이용하던 출입문이다. 다른 궁전의 건물이나 시설물들도 다들 나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이 궁문은 조선 궁중 사에서 가장 슬픈 사건을 지켜보게 된다.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쌀을 보관하던 뒤주에 갇혀 온갖 모멸을 견디며 기갈과 굶주림으로 신음하며 여드레 만에 이 문 앞에서 죽게 된다.


이 궁중 전원 가운데 관천대가 있다. 방형의 석대 위에 6개의 계단을 두어 오르내릴 수 있게 했다. 석대 위 귀퉁이에는 귀여운 꽃 봉우리 모양의 장식을 가진 사각석이 세로로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별을 관측할 수 있는 기구(소간의)를 비치할 수 있는 받침석이 놓여 있다. 이 받침석의 상단은 방형이며 잘록하게 원형으로 가늘어져 내려오다 건물의 기둥을 받친 초석처럼 넓게 퍼져 하중을 감당하게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아담하며 우아하다고 생각을 들게 한다. 이것의 기능은 첨성대처럼 하늘의 별들을 관측하는 것이었으나 경주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다. 그래도 하늘의 별을 관측하는데 이상이 없었겠다 싶다. 지금은 여기저기 밝게 빛나는 전등이나 차량의 불빛으로 인해 서울 어디에서도 별을 관측하기 어렵다. 허나 그 땐 달랐다. 평지에서도 달과 별을 볼 수 있었다.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조금의 높이만 허용되면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이런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한 결과를 종합하여 국가에서는 책력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이다. 이건 파종과 추수 시기 등을 기록한 것으로 요즘의 달력과 비슷한 것이다. 매년 동지가 되면 이런 책력이 국가에서 만들어져 전국으로 배포된다. 만약 이 책력이 잘못되어 모 심기 철을 놓치거나 벼 수확을 그르치게 되면 큰일이다. 그래서 이런 하늘을 살펴보는 관천대가 그저 상징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창덕궁 쪽으로 나아가면 이곳 역시 숲이거나 텅 빈 공간이 차지하고 있다. 이른바 동궁 터인 것이다. 사도세자가 자란 저승전을 비롯한 여러 동궁 전각들이 있었던 장소이다. 저승이라고 하니 죽어서 가게 되는 세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저승이 아니고 이때의 저(儲)는 태자라는 의미이며 승(承)은 앞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통설은 사도세자가 경종의 부인을 모시던 궁녀에 의해 이 저승전에서 키워졌으며 그녀들이 당시의 왕인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게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이런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퍼져있었다. 경종이 임종할 당시 영조가 간장 게장과 생감을 드려 먹게 함으로써 죽게 되었다는 소문이다. 한방에서는 게와 감이 상극이어서 이를 함께 먹으면 죽는다고 되어 있다 한다.

이런 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소문은 많은 역사적인 비극을 만들어 낸다. 경종의 어머니는 우리가 다 아는 희빈 장씨이다. 흔히 사극에서는 이 여인을 독한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 여인은 중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궁궐로 들어가 그 혹독한 경쟁을 뚫고 왕의 사랑을 쟁취한 여인이었다. 이처럼 왕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된 이 여인은 인현왕후를 지지하는 노론과 대척점에 서게 된다. 한편 노론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남인들은 희빈 장씨를 지지하며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조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당시 노론들이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 목적으로 왕과 결혼을 하게 한 여인이 인현왕후이었다. 이런 국혼을 한 왕후의 경우에는 명문 가문 출신이라는 정치적 후광이 있기에 이런 배경 없이 왕의 사랑에만 의존해야 했던 많은 궁녀들에 비해 그리 왕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절실한 노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왕의 사랑을 받는 여자로서의 역할보다 정치적인 중심점이 되어 친정의 가문을 보호하고 성장케 하는 디딤돌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 속에 인현왕후는 희빈 장씨와의 사랑싸움에 져 폐서인이 되어 출궁하게 된다. 그 때 노론의 구세주로 등장한 여인이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이었다. 이 여인은 궁녀도 아니었고 그 궁녀 밑에서 허드레일을 하는 무수리였다. 희빈 장씨와 대척점에 서 있던 노론 세력들은 이 보잘 것 없고 정치적인 후광도 없는 이 여인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는 왕의 새로운 사랑이었던 이 여인을 통해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를 궁지로 몰고 가게 되었다.

다시 희빈 장씨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운 노론들은 이 여인을 죽이는 것에 이르게 된다. 이어 당시 세자로 있던 경종을 축출하고 영조를 세자로 옹위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지만 여기까진 이르지 못하고 선왕이 죽게 되어 경종이 다음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결국은 노론의 주축이었던 4명의 대신들은 이 경종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나 어찌 된 일인지 병약했던 경종은 즉위 4년 만에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시 노론 세력의 반대편에 서있던 소론들은 말할 것도 없겠거니와 일반 백성들도 갑작스러운 왕의 죽음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드디어는 영조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청주 성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이게 다 영조가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음모론에서 출발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도세자는 동궁인 저승전에서 성장하였고 그곳에 남아있던 경종을 모시던 궁녀들에 의해 못된 생각이 이식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의문점을 제기하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어찌되었든지 영조에게 경종을 독살하려 했다는 음모론이 부담이 된 건 사실이었다. 사도세자가 5세가 되던 때에 이제 세자가 저만큼 성장했으니 선위를 하겠다고 했다. 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영조는 절대 난 왕위를 차지하려는 욕심이 없었던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허나 죄 없는 세자는 어떻게 되는가. 춥고 눈 내린 뜰에 엎드려 석고대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선위하겠다는 명을 거둘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 그 어린 아이의 맘은 어떠했겠는가. 이런 일은 여섯 살 때도 있었다. 무려 열대 번에 걸쳐 이렇게 선위 파동을 일으키는데 그 때마다 난리법석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간직했던 동궁전은 이미 모두 소실되어 사라져버렸고 텅 빈터에 나무숲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박진하는 동소문동의 명소인 작은 식당 ‘디미방’을 부인과 함께 운영하고 있고, 요가와 명상 전문가이기도 하다. 본지의 편집위원으로 성북동을 사랑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는 진정한 성북동 사람이다.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3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9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9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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